베트남KOICA생활 2015~6

[스크랩] 베트남인

cool2848 2016. 7. 4. 01:57

 

 

 

 

 

 

 

1.아오자이의 매력

 

베트남을 아오자이(Ao Dai 남부에서는 아오야이로 발음)로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쌀국수, 삼각형의 전통모자 논(Non), 자전거 택시 시클로(Cyclo)와 함께…. 아오자이를 입고 논을 쓴 여인의 실루엣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고혹적입니다.

 

아오(Ao)는 옷, 자이(Dai)는 길다는 뜻이므로 말 그대로 ‘긴 옷’입니다. 길이가 긴 상의와 품이 넉넉한 바지가 일습입니다.

 

아오자이 이전에 전통복으로는 아오 임(Ao Yem)이 있었습니다. 임(Yem)은 ‘앞가리개’의 의미로 천으로 가슴과 배를 가린 옷입니다. 그 옷을 입은 옛 사진을 보면 보자기를 펴서 가슴과 배를 가려서 그 끝단을 뒤로 묶는 단순한 복식이었습니다. 그러니 등 부분은 완전히 드러내는 전통복식입니다.

 

하지만 아오자이는 목 아래의 온 몸을 감싼 옷이지요. 몸을 모두 덮었지만 중국의 전통의상인 치파오(旗袍, 기포)와는 달리 대단히 관능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서양의 옷처럼 직접적으로 신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늘하늘한 새틴(sateen) 천이 몸에 붙는, 여성의 신체곡선이 강조되는 실루엣 때문에 몸매가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됩니다.

 

아오자이를 입을 때는 언더웨어 외에는 아무 옷도 받쳐 입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반투명의 시스루(see-through) 재질로 피부가 살짝 비쳐 드러나 보이는 천을 사용한 아오자이는 프레이저와 팬티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숫기가 없는 남자는 시선을 둘 곳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몸의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다 속옷까지 그대로 비쳐나니 남성들에게 아오자이는 강력한 인상으로 다가올 수밖에요.

 

그렇지만 현재, 베트남의 일상에서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한복처럼 전통복은 명절이나 예식에서나 입는 옷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쉬움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에서나 결혼식을 앞둔 예비신부가 공원에서 촬영을 하는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습니다.

 

 온 몸을 덮은 아오자이지만 맨살이 드러나는 곳이 딱 한 곳 있습니다. 허리 양옆의 3~5cm쯤 입니다. 윗도리의 허리부위에 바지윗까지 깊은 슬릿(slit 트임)을 만들어서 살갗을 노출되게 했습니다.

 

한복의 짧은 저고리는 팔을 들지 않는 한 겨드랑이 부분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오자이의 경우, 양팔을 내린 상태에서도 그 슬릿을 통해 삼각형으로 맨살이 드러나도록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출이 결코 천하거나 속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매혹적이면서도 긴장을 주는 격조를 잃지 않습니다.

 

아오자이는 원피스 형태의 치파오가 개량된 것으로 옷깃은 차이니즈칼라입니다. 치파오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입었던 것으로 옆트임은 말을 타는데 편할 수 있도록 옆을 갈라놓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2.베트남의 신여성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교복이 아오자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흰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를 탄 모습은 또 다른 베트남 여인의 매력으로 각인되어있습니다.

 

이 아오자이를 몸매 좋은 한국여성이 입어도 그들처럼 아름다울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옷은 허리가 길고 골반이 짧은 베트남여성들의 신체적 특징이 반영되어있습니다.

 

반면 한국여성의 경우 허리와 골반의 길이가 비슷하기 때문에 아오자이의 맵시를 살릴 수 없습니다. 반면 베트남 여성의 경우는 키 작은 여성이 입어도 긴 허리 탓에 늘씬해 보이는 게 아오자이의 특징입니다.

 

신체의 특징이 꼭 맞게 반영되어야하므로 아오자이의 경우, 기성복을 사서 입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윗도리는 몸에 딱 맞게, 바지는 헐렁하게 바느질한 맞춤복을 입습니다. 신체의 16부분 정확하게 측정하여 옷을 짓는답니다.

 

길거리에서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를 탄 여성을 찾기 어렵지만 현재 새롭게 뜨고 있는 신여성복장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신여성은 2년 전부터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여성으로,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 오토바이족 여성을 말합니다.

 

첫째는 엉덩이를 앞으로 바싹 당겨서 않는다.

둘째 뒤에서 보았을 때 허리의 S라인이 드러나도록 꼿꼿하게 90도로 앉고 팔꿈치를 붙인다.

셋째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

넷째 이탈리아 수입산 오토바이를 탄다.

 

이 자세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앞으로 쉽게 꼬꾸라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재 베트남의 거리에서는 신여성의 바람이 더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3. 나라걱정 뿐인 남자, 현실의 무게는 여성에게

 

베트남에서 길거리 카페에서 빈둥대는 남자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혁명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여자가 경제 생산의 주역으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1천여 년이 넘는 동안 중국과 프랑스에 지배받아온 현실에서 남자는 전쟁을 준비하는 전사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생산의 노동에서는 열외 되었습니다. 그 역할은 온전히 여자들의 몫이 된 것입니다.

 

효성이 지극한 이 나라에서 그 효도의 역할도 모두 여자가 감당할 일이 되었습니다. 설혹 이혼을 하드라도 전시부모들조차 이혼한 여자가 부양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은 재혼이라도 하면 총 6명의 부모님(친정부모, 전시부모, 현시부모)을 모셔야하는 현실을 감내하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금도 남자들은 여전히 길거리 카페에서 전쟁의 동원을 기다리고 말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한량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시간이 남아도는 남자들에게 평화의 시대는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술과 도박, 불륜입니다. 술을 살 수 없는 가난한 남자들이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는 경우도 있어서 시력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전당포(깜도 Cam Do)가 많습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이들이 급전을 융통하는 곳이 바로 깜도입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축구 경기에 돈을 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식민지시절의 프랑스 영향으로 성적으로 개방적인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하노이 거리에 자주 눈에 띄는 간판이 '냐 응이(Nha Nghi)'입니다. Nha는 ‘집’이고 Nghi는 ‘쉬다’는 뜻이니 '쉬는 집'인 것입니다. 바로 대실용 러브호텔입니다.

 

손톱을 기른 남들도 있습니다. 베트남 여성들이 미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흰 피부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부유층의 과시(베트남 여성들이 흰 피부의 유지를 위해 외출할 때면 거의 우주복을 입은 것처럼 온몸을 감싸는 경우가 흔합니다.)라면 남자들에는 손톱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4. 여성의 날

 

베트남에는 여성을 주제로 한 날이 세 번이나 있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 어머니의 날(5월 둘째 주 일요일), 베트남 여성이 날(10월 20일). 남성들은 이 날에 꽃다발을 비롯해 선물을 합니다.

 

긴 대나무 양쪽 끝에 바구니를 메단 꽝 가인(Quang Ganh, 어깨에 걸치는 지게)을 멘 여성, 베트남 여성을 짓누르는 것은 꽝 가인만이 아닙니다. 들에서 모를 심는 사람도, 물건을 파는 사람도 모두 여성입니다. 논(Non)으로 햇빛뿐만 아니라 삶의 무게를 가리고 끊임없이 노동에 내 몰리고 있습니다.

  

길거리 카페에서 하루 종일 말뿐인 나라걱정 대신 여성을 짓누르는 그 어깨의 짐을 나누어졌으면 좋으련만….

 

 아오자이의 아름다운 베트남 여성만을 생각했던 이번 7월 중순의 여름, 현지에서 목도한 베트남 여성의 현실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싶었습니다.

 

 

 

 

 

 

 

 

 

 

 

 5. 한국 남자와 결혼하려는 베트남 여성

 

한국인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의 팬이고 한국에 관심이 많다.

 한국인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의 팬이고 한국에 관심이 많다.한국인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의 팬이고 한국에 한국으로 시집가려고 결심하는 여성들은 어느날 갑자기 한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집들에 가보면 한국영화 시디가 몇 편 정도는 가지고 있으며 한국드라마를 자주보고 중국 연예인과 한국 연예인 잘 구분한다. 그야말로 한국팬이자 한국과 한국인에 좋은 감정을 갖고있는 편이다. 그런 그들은 우리는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

 

한국인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들의 가정은 대체로 가난하다. 베트남 농촌 대체로 어렵지만 특히 한국으로 결혼하려는 여성의 가정에 가보면 정말 극한 상황인 경우가 많다. 가족 중에 한두명은 병을 앓고 있고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거의 전무하다.

 

살림살이라곤 그릇 몇 개와 오랜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대나무 젓가락이 전부이다. 배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가 겨우 빚을 내어 조그만 땅에 집을 지어 정착하긴 하였으나, 빌린 많은 돈<5백만동~천오백만동>의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도 갚기 빠듯하다.

 

추수철이 되면 돈을 벌기위해 남의 품팔이를 하여 이틀 일해 십만동<1꽁기준>정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한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드니까 아이들 학교는 생각조차하기 힘들다. 자전거를 사서 매일 태워보내야 하는데 남의 집 품팔이를 하기 위해선 매일 학교를 보내는 것을 거의 불가능해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일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오직 오늘만 있다

 

주식은 추수하고 난 남의 집 논에서 이삭을 주워와 햇빛에 말리고 나무방망이로 때려 다음 추수때까지 몇 개월치의 식량을 마련하는 집이 많고 반찬은 강에서 생선을 잡아서 해결한다.

 

과연 영웅 호치민이 바라던 베트남이 이런 국가였을까 하는 반문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빚을 청산하는 것이다. 부담이 제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에서 남자들은 변변한 돈벌이가 없고 돈을 버는데 한계가 있어 고기잡는 일을 하기 수개월씩 집을 떠나 있는다. 보통 월급은 몇개월 일한 것을 일시불 주는데 출어량이 많은 경우는 한달에 백칠만동<십만원>정도의 월급을 주지만 고기를 못잡거나 출어를 못하면 임금이 백만동<6만원>정도이거나 임금 받기가 어려워진다.

 

남자가 돈벌로 가면 모든 가정일은 여자가 꾸려 나간다. 이런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어린나이에 국제결혼을 택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이런 아픔을 안고 있다. 한국으로 시집가면 어쩌면 남편으로부터 도움도 받고 보다 나은 생활을 할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다.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한국남성은 어려운 처가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인과 결혼하는 여성들은 가난한 환경때문에 정규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대부분의 베트남의 농촌여성들은 칠판놓고 조그마한 가정집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닌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결혼중계 업체에서는 "고등학교"나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규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거의 드물다. 보통 12학년정도 다닌 여성들이 많다.

 

 

 

 

 

 

 

 

 

 

 

 

6.아름다운 베트남 여성

 

베트남 여성은 대체적으로 미인들이 많은 편이다. 우리 연예인보다 예쁜 여자들도 길거리에서 자주 본다. 베트남 여성들은 머리는 적고 어깨가 좁고 하지장이 길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면 사진발이 잘 받고 상당히 커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키가 큰 사람은 많지 않으며 요즘은 사진관에서 성형을 해주기 때문에 사진보고 실물보면 좀 다른 경우가 많다. 체형은 딱 마네킹 체형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베트남 여성들은 순수하고 착하다.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때묻지 않는 순수함이 간직하고 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 주려고 하고, 남의 어려운 일에 관심이 많다. 불의를 보면 못참는 성격이지만 겁은 많은 편이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서 인지 물질적인 욕심이 많아서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많다. 특히 귀금속을 많이 갖고 싶어한다. 욕심이 많고 자존심이 강한 편이다. 자존심이 강해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을 듣기란 힘들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주는 말이나 행동을 피하는게 좋다.

 

인사성이 없어보이나 말로하는 인사가 그네들 문화이다. 나이 많은 어르신이나 부모님께 인사하는 모습을 본적은 없다. 그러나 효심이 많고 나이 많으신 어른들께 잘한다.

 

많은 전파매체나 인쇄 매체에서 베트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베트남 여성이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다.  이전에는 여대생들이 아오자이를 입었지만 현재는 여고생들의 교복이 아오자이로 바뀌었다. 그래서 아오자이를 입고 있는 젊은 여자는 고등학생이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 베트남 여성이 아오자이를 입고 있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그것은 일류 모델이라서가 아니라 베트남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아오자이를 외국의 패션모델이 입는다고 해도 베트남 여성처럼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바로 아오자이는 베트남 여성을 위해서 만들어진 의상이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더운 지방에서 자라난 베트남 여성들은 비만체형이 거의 없다. 대부분 약간 마른 스타일이고 신장도 160센티미터를 넘는 여성들은 드물고, 평균체중이 보통 40~45kg이다. 하지만 신체의 비례구조는 서양의 체형과 닮아 하체가 상체보다 길다. 20군데 이상 치수를 재어 만드는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이 그래서 아름답다.

 

길가에서 마주친 베트남 여성은 처녀인지, 아니면 아이를 갖고 있는 아줌마인지 전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이미 결혼을 한 여성이라도 대부분 긴 생머리 헤어스타일로, 몸에 밀착된 옷을 입고 있는 여성들이 많아 전혀 구분이 안 된다. 출산 후에 몸이 망가진 여성들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근 몇 년간에 비만형의 베트남 여성이 많이 늘고 있다.

 

장년층의 여성들도 아니고 20대 초반이나 후반의 여성들이 눈에 띄게 살이 쪄 가고 있다. 물론 일부이긴 하겠지만, 식생활의 개선으로 인해 영양가 많은 음식을 섭취하고.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아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심한데 이는 부모의 과다한 자식보호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하루 두 번 학교가 끝나는 시각에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학교 정문 앞에 수 십 명씩 진을 치고 있는 광경을 보면 이들의 자식 과잉보호가 실감이 간다.

 

베트남은 자식들의 교육열에 대한 한 한국에 못지 않아 한국의 일부 학부모 처럼 아이들의 학비를 위해 남의 집에 파출부로 나가는 일이 흔하다. 베트남 젊은 여성들은 헐렁한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지를 입던 블라우스를 입던 간에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트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기후가 더우면 헐렁하게 입는 것이 더 시원하고 몸에도 좋으련만.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베트남 여성은 구경하기 힘들다.

 

그리고 체형이 작아 옷을 파는 베트남 상점에 진열해 놓은 티셔츠를 보면. 흡사 한국의 여중생이 입으면 맞을만한 작은 사이즈의 옷이 대부분이다. 물론 40대 이후의 중년의 베트남 여성들은 이 경우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집안에서 가장 많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파자마’ 스타일의 옷이다.

 

베트남 인들에게는 이 스타일이 어떤 형식인지 모르고 있겠지만, 보기에도 잠자리에 들 때 입는 바로 그 ‘잠옷’이다. 이 옷은 집안에서만 입는 것이 아니고 바깥 일을 볼 때도 입고 다닌다. 거리에서 무엇인가를 파는 여성들의 옷 차림 중 60퍼센트 이상이 바로 이 옷이다. 물론 회사에 출근할 때 입지는 않지만 실 내외 구분 없이 이 ‘잠옷’을 입고 다닌다. 물론 이는, 한국인의 시각에서 본 것이라 흉이 되지만, 베트남 여성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옷을 입고 다녔기에 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옷차림은 가내에서 집안 일을 하거나 집 밖에서 일을 하기에도 편하긴 하다. 그래서 시내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에서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 베트남 여성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베트남 인 중에 멋 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여성이다. 남자들은 옷을 대충 입고 다닌다. 물론 빈부의 차이에 따라 선호하는 것이 틀린 것이 당연하지만, 여성들이 패션에 민감하고, 의상을 판매하는 가게에 들러보아도 대부분이 여성의류이다. 백화점 매장 중의 남성 의류 매장에서는 고급 정장이나 와이셔츠, 면 바지 등을 주로 팔고 있지만, 이 곳을 찾는 손님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외국인들이 대상이고 일부 베트남 남성만이 찾는다. 남성들은 거의 면바지나 청바지에 남방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들은 다르다.

 

다양한 종류의 디자인과 색상으로 많은 여성의류가 진열되어 있고, 일반 티셔츠부터 원피스, 블라우스 등 다양한 의상이 팔리고 있다. 베트남 여성들은 치마를 잘 입지 않는다. 물론 활동하기 불편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청바지 아니면 주로 면바지를 입고 다닌다. 하기야 치마를 입고 스쿠터가 아닌 일반 오토바이를 타려면 그것도 힘들테니 말이다. 어깨가 드러난, 약간은 야한 차림의 여성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선 극히 일부의 한국 여성들을 제외하고 유흥업소나 가야 볼 만한, 그런 의상을 입고 다니는 여성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의상을 입은 여성이 그런 곳에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더운 날씨에 적응이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출이 되는 옷을 선호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약간 야한 차림의 베트남 여성을 만나더라도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한국은 호주제 폐지로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시끄럽지만, 이 곳 베트남의 여성들은 굳이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베트남에서의 여권 신장은 베트남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서 직접 눈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침에 여자가 차를 몰고 나왔다고 눈살을 찌프리거나 타박하지는 않는다. 자기 상사가 여성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하는 법은 없다.

 

베트남에서의 여성은 당당한 한 개인으로 남성 못지 않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여성을 존중하는데 인색한 한국남성과 베트남 여성간에 간간이 마찰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6. 베트남여성의 이성관

 

무엇보다 먼저 한국인 포함 외국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여성들은 몸을 파는 직업 여성들이나 그와 비슷한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보고 잠깐 여행 온 한국인들은 베트남 여성들이 성이 무척 개방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구는 몇 퍼센트 소수에 불과합니다.

 

더 많은 여성들 몹시 유교적으로 완고합니다. 또는 길 가다가 눈이 바주치며 서로 인사하고 미소지어 주는 문화가 한국보다 많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이라면 눈이 마주치어 미소를 짓는다면, 속된 말로 "미쳤나~ 왜 웃어~" 할텐데 그들은 웃습니다. 그러면 한국 남자들 오해 합니다. 자기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는줄 알고... 또는 실제로 화류계 직업여성들이 미소를 짓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외국인들이 주로 다닐 수 있는 길목에, 그들도 주로 다니니까요.그러나 눈이 마주치면 가차없이 고개를 홱돌려 버리는 여성들 많습니다. 30% 정도... 어쩌다가 몸이 일부가 닿아도 자지러지듯이 놀라는 여성들도 반은 될 겁니다.

 

점심 식사에 초대해도 부모의 승락을 받아야 한다는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결코 성이 헤프다던가 개방적이라고 볼수 만은 없습니다.

 

이제 그들 베트남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보자면 베트남 여성들은 매우 사회적입니다. 한국에 비해서 사회 생활하며 배우자를 부양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몹시 이성관에 있어서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입니다. 남성이 자기만을 바라 봐 주기를 원합니다. 다른 여성에게 한눈 팔면 곧 사생결단 내고자 합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과 겹쳐서 싸움을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간단한 말 싸움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든 말든 끝까지 이기려 합니다. 한국 부부들 비록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더라도, 마지막 넘어야 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는 않는 선 까지에서 싸움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기 위해 끝까지 갑니다. 그래서인지 이혼율이 몹시 높습니다.

 

한 부부가 이혼을 한다면 90% 자녀 양육은 여성이 책임집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이 원한다면, 비록 술집에 나가는 여성들도 몸 파는 것 만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경제적인 책임을 지어야 하고, 가진 자본이 없다면 몸을 팔아서라도 생계를 꾸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조 관념을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하는 남성을 만난다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남성들도 가정에 대한 책임과 정조를 아는 남성들이 대부분입니다.  베트남의 남녀 모두 사랑은 오로지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단지 외국인을 접하는 직업 여성들이 남성들을 비난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주로 남성과의 생활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한 남성만을 사랑하고, 한 여성만을 사랑하며 평생 살아가는 베트남 부부가 매우 많습니다.

 

매우 많은 베트남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참 잘합니다. 손톱 발톱 다 깍아 주고, 밥 먹을 때 생선 가시 발라주고 온갖 시중 다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한눈을 판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남성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남녀의 도리라고 생각한답니다.

 

 

 

 

 

 

 

 

 

 

 

7. 베트남인의 돈에 대한 감각

 

베트남인에 대해 짜증이 나거나 싫어지는 경우가 있다.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돈에 대한 인식이 다. 선비는 가난해도 체면을 중시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으로 문제가 발생하여 어떤 보상이나 책임을 지지 않은 경우 서로간의 신의를 지킨다고 한다던지 책임을 지려고 노력을 하는 베트남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베트남에서 택시에 지갑을 흘렸을 경우에 거의 100% 돌아올 가능 성은 없다. 그리고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도 외국인인 것을 알게 된다면 가격을 뻥튀기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다. 그래서 물건을 줄 때는 반드시 현금과 같이 주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다.


물건을 먼저 전해주고 나중에 돈을 준다고 하면 아마 찬물 마시고 정신 차리고 다시 오라고 할 것이다. 물건을 받기 위해서는 최초 어느 정도의 계약금을 지불해서 도착 시에는 잔금을 상품과 동시 에 받는 것이 상식이다.


요즘 은행 등에서 선전을 많이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신용카드는 일반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는 인연이 없는 물건이다. 현금 이나 금 등이 일반적인 결재수단인 것이다.


베트남에서 자주 듣는 말 Het Tien! Het Tien(Het=없어지다 Tien=돈 Tien=우정)돈이 없어지면 우정도 없어진다는 베트남어 속담이 있다. 한국의 속담 중에 비슷한 것이 있다 돈 떨어지니 정도 떨어지고 임도 떠나간다. 베트남은 우정이고 한국은 정과 임이라서 조금은 뉘앙스가 틀리지만.


그리고 베트남인의 돈에 대한 강한 집착에도 가끔 의아한 것은 베트남인과 식사를 한다던지 술을 먹으러 갈 때 일본처럼 더치 페이를 한다던지 그런 습관은 없다. 거의 이때만큼은 한국이랑 비슷 하다. 아무리 머리를 짜 내어도 베트남인의 본질을 이해 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요컨대 베트남 전체적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라든가 신용과 같은 사고방식이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이므로 집 안 이외의 돈을 제외 하고는 신용 하지 말라고 한다. 예전에 근처에 야식을 자주 먹으러 가는 작은 음식점 아줌마가 “손님! 베트남의 여자에게는 꼭 주의하라고” 필자에게 자주 이야기 를 했다. 똑같 은 베트남사람들도 베트남 여자가 최고예요 라고 하면 모르겠지 만 왠지 복잡한 마음 이였다.


한국이라면 돌팔매를 맞아야 할 정도인 필자의 지인은 지금도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베트남에서도 돈으로 사랑은 살 수는 없지만 돈이 많이 있으므로 가난한 상대의 가족을 원조? 하면서 점차 정이 샘 솟아 날지도 모르겠지만 돈도 애정의 하나의 수단 일 수도 있다.


베트남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는 분이 있다면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주변을 공략하고 특히 그 집 부모의 마음에 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난하지만...당신의 따님을 저에게 주십 시오 라고 말하는 것은 계인의 자유지만 가난에도 레벨이 있다.


가난하다라고 말해도 일반적인 베트남인은 한국인은 부자다라는 선입관이 있다.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갔을 때 정말로 텅텅빈 가난 한 한국인이라고 알자 신부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태도가 급변했 다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한 수컷이 암컷을 획득하는 제일의 방법이 지만 현대의 인간 사회에서는 체력적인 강함이나 아무리 싸움을 잘 한다는 것 보다 재력이나 권력이 남자의 평가를 저울질하는 하는 것은 조금 유감이다. 고학력, 핸섬, 부자 이 3박자가 고루 갖추어지고 덧붙여 바람이나 도박도 안 하는 친절한 남자라면 완전히 금상첨화이겠죠. 필자가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이지만 아마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역시 남자는 재력이 나 권력이 중요한 것일까...

 

 

 

 

 

 

 

 

 

8.베트남인의 유교

 

 

동아시아 종교에 정통한 미국의 위튼버그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제니퍼 올드스톤무어가 쓴 [동아시아 문화의 열쇠 유교, 2007]에서는 유교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사람들의 심성과 관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왔고, 오늘날의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가 되는 종교 전통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충남대학교의 2009 8월호 유학신문에 의하면 충남대 유학연구소는 베트남 유교와 한국 유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이라는 주제로 2009 8 10~11일 양일간에 걸쳐, 베트남 하노이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고 한다. 20여명의 학자가 논문을 발표했는데, 한국과 베트남의 차이점에 대해 발표한 교수는 유일하다고 언급하며, 이 국제학술심포지엄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유교를 중심으로 한 이번 학술교류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공통된 문화의식을 조망했다는 점에서 향후 두 국가 간 관계증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이러한 언급은 두 나라의 차이점보다는 공통된 문화의식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9 7월 광주에서 개최된 아시아 청년 포럼에서 조선대학교의 안경환 교수는 [-베 관계의 미래를 향한 제언] 이라는 논고를 통해 베트남 연구자로서 한-베 관계에 있어서 네 가지 사촌관계를 주장하며 역사, 문화적 유사점과 동질성에 대해 강조했다. 문화적으로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어 전통 가정의례가 동일하고, 전통문화의 뿌리가 같아 문화의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베트남역사학회 학자들로부터 한자로 된 1차 자료를 연구하여, 베트남 역사학자보다도 더 베트남 역사에 대해 깊이 연구한다는 평가를 받는 서울대학교의 유인선 교수는 그의 책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의 머리말 첫 문장에서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베트남 역사는 우리 역사와 무척 비슷하다고 한다.고 서술했다.

 

이에 중요한 이유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젓가락 문화, 한자문화, 제국주의 식민지배, 분단 상황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베트남 문화의 유사점의 원천으로 두 문화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중국문화, 특히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인선 교수는 머리말의 결론부분에서 베트남 문화는 우리와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적지 않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베트남 이해가 지극히 피상적이라고 도전을 하며,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더 깊고 넓은 베트남 역사문화 연구를 제안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 유교문화의 유사점에서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베트남 유교의 비판적 수용, 즉 유교의 베트남화이다.

 

한국의 유교는 이씨 조선 5백 년을 통해 노론정권을 중심으로 정통유교사상을 숭배하였지만, 베트남은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 유교의 베트남화를 시도했다.

 

외형적으로는 중국의 틀을 취하였지만 내재적으로는 중국과 많이 다르다. 특별히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모계사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는데 이런 부분이 베트남 유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은 칠거지악의 규칙을 만들어 남존여비, 여필종부 사상을 강조한 반면, 베트남은 부인의 재산권과 이혼권을 인정했고, 여성의 대외활동이 많았으며, 이로 인한 여성의 사회적 영향력 또한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 4 '말레이 해적과 베트남 여성'에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10세기 이후부터 베트남 여성의 교역활동이 매우 활발했으며, 교역활동은 점차 확대되어 17-18세기 호이안 항구에서 서양인들과 교역활동을 하던 대부분의 베트남 상인들이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민망황제시대가 시작되면서 여성의 대외교역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으며, 원양 교역선을 타고 해외로 나가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민망황제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베트남 황제였는데, 특히 베트남 황제 중에 처음으로 여성의 적극적 대외 활동을 위해 치마대신 바지를 입도록 명령을 내린 왕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성의 대외활동을 통한 지위 향상을 볼 때 당시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베트남인으로서 대만 국립대학교에서 동아시아 문화에 대해 연구하며 많은 성과를 내고 있는 쩐 반 도안(Tr?n V?n ?o?n) 교수는 베트남 철학은 다른 사상을 종합해 베트남 사상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렇게 뛰어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베트남 사람 속의 생활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베트남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의 응우옌 따이 트 교수는 2010 4월 충남대학교 유교 논문집에 실린 [베트남 유교의 몇 가지 기본 특징]에서 베트남의 중국 유교의 비판적 수용 부분은 유교의 절충(베트남화) 및 유교서적들을 간결하게 번역하는 것 등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둘째, 학파가 없고, 탁월한 유학자가 많이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베트남 유교는 깊고 넓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셋째, 수평적, 관용적 사회로의 발전이다. 실제적인 부분으로 한국의 유교는 규범의 나라를 표방하며, 여러 규칙을 만들었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규칙이 많은 나라로 관혼상제, , , , 특별히 여성에 대한 규칙으로 칠거지악을 강력하게 시행하므로 유교가 사회적으로 절도를 중시하고, 수직적 사회구조를 만들며 엄격하게 발전해 나갔다.

 

반면 베트남 유교는 전통적 문화 기반 위에서 뿌리를 내렸지만 이씨왕조에서 기틀을 마련하고, 레 타잉 똥(L? Th?nh T?ng) 시대에 꽃을 피우며, , , 예를 강조했지만 조선처럼 수직적 구조의 엄격한 사회를 조성하지는 않았다. 또 수직적 구조 속에서도 촌락중심의 수평적, 관용적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부분도 응우옌 따이 트 교수의 논문에 언급되어 있다. 

 

 넷째, 개방적이었다. 베트남 유교의 독특한 면에 대해서 최병욱 교수는 민망황제 때에 유교국가의 특징인 농본, 서학배척, 유학존중 등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엘리트들로 구성된 수 백 명에 이르는 선단을 구성하여 해외로 파견하여 해외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했다고 한다.

 

 다섯째, 현실주의이다. 서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그의 저서 [베트남 일기]에서 베트남 유교의 현실주의를 직시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베 문화의 유사점을 가지게 하는 가장 큰 근원은 유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 걸쳐 유사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유사점 속에 내재된 이 차이점이 한-베 국민의 국민성과 사회 작동원리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유교의 특징은 비판적 수용, 즉 유교의 베트남화이다. 학파가 없고, 탁월한 유학자가 많이 없다는 것이다. 수평적, 관용적 사회로의 발전이다. 개방적이며 현실주의이다. 

 

 

 

 

 

 

 

9. 자존심 강한 베트남 여성

55개 민족이 살고 있는 벳남은 서로 간의 갈등이 있지만 크지는 않아 보입니다. 주류는 낑족(비엣족)있습니다. 비엣족은 중국 남부에도 살고

있을 정도로 중국 화남지역의 중국인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낑족은 베트남 북부와 남부에 주로 사는 편이고 북부 베트남인들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서 중국에 친화적이고 근검절약하는 편입니다.

 

최근 북부인들인 돈을 벌기 위해 남부에 진출해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많아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이 되는 기간산업 같은 경우 북부인들이 다 차지한다고 합니다. 통일 된지 4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남, 북의 차별이 심해 보입니다. 북부 베트남인들은 남부 베트남인들을 무시하는 편이고 남부 베트남인들 상대로 사기를 잘 친다고 하네요. 

 

그런 반면 남부 낑족들은 캄보디아 국경과 접해 있고 과거 크메르 땅이여서 그런지 캄보디아에 친화적이고 크메르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남부인들은 게으른 편이고 말을 많이 하고, 군중심리에 잘 휩쓸리는 편입니다.

 

특히, 베트남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한다면 여성은 가날프지만 외형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남자에게 잘 지지 않으려고 하고 생활력이 강한 편입니다. 남자를 우습게 보는 경향도 있고 남 흉보기를 좋아하고 다른 남성에게 눈길을 잘 주는 편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6개월을 잠자리 비우면 벳 여자들은 다른 남자를 들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결코 남자에 주녹들지 않고 맞서는 편입니다.

 

그런데 반해 남성은 여성에게 눌린 듯한 내성적인 기질이 있고 술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바람을 잘 피우지만 가정에 충실하고 여성을 배려하고 잘 맞춰 주는 편 같습니다. 약간 게으르고 사회적인 책임감이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부족한 것 같아 보입니다. 

 

외국 문화나 외국인들에게 꺼리지는 않지만 이해관계가 얽히면 배타적이고 뭉쳐 몰아 치는 경향이 있어 한인들은 벳남인들 보고 "자기네 들끼리는 정말 좋은 민족"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10. 베트남 지역에 따른 배트남인의 특성

 

일반론
베트남인 사이에 들어가 묻자 "그 녀석은 북부 사람 이니까"등의 지역론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실제로 지역감정도 강하게 남아 있기도 하여 지역적인 다툼도 종종 일어난다. 남부 · 중부 · 북부의 세 지방 요리의 차이가있는 것처럼 각 지방의 사람의 기질도 각각 인것이다.

 

남부 사람
일반적으로 베트남인들 중에서도 개방적이고 낙천적인 성향이 가장 강하다. 낯가림 없이 외국인에게도 친하게 대하는 편이다. 카페는 대낮부터 한가로이 보내는 다 사람들로 넘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유가 있고 통이 크고 대범한 성격이 형성되어 있다. 또한 북부 사람에 비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개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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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사람

매년 태풍이 내습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는 지방이다. 산악지형이 많고 전통적인 풍습에서 매우 "어려운"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북쪽 중부에 위치한 게안성은 호치민의  고향으로 프랑스 식민지 시대 저항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저항 정신의 강도에 있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정평이 나있고, 특히 게안성 출신은 다양한 상황에서 무리를 지어 뭉치는 경향이 있어 악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주변상황에 쉽게 동화되지 않아 특히 외국인이나 외국회사 등에 거부감을 많이 가지고 있어  사람을 다루기 쉽지 않아 실제 인력채용에서 꺼리는 경향이 있다. 

 

북부 사람
남부 사람과 비교하면 더 까다롭고 계산적이나 허물은 없는 편이다. 검소한 편이고 꼼꼼하고 실리적이다. 그러나 여행을 위해 체류하는 경우는 남부 사람과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또한 집단 행동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자주 듣지만 이것은 남북 통일을 주도한 조직력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된 것 같다.

 

 

 

 

 

 

 

 

 

 

11. 베트남인의 특성

 

첫 번째. 기다림, 참음의 대가이다.

 

아시는 분이 (월남전 참전하시고, 여기서 일하십니다.) 이야기 해주신건데...월남전 참전하셨지만 현지인들 깔보지 않습니다. 존중 해줍니다. 같이 이야기 하다가 살짝 여쭈어 봤죠... 옛날에 느낀 현지인들과 지금 젊은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음....다른점은 별로 없는것 같다...자존심 강하고... 잘 참고...  보수적이고... 요즘애들은 너무 돈을  밝힌다. 전투할때 베트남 군인들과 대치할때.. 약 30시간을 업드려 있은 적이 있는데..베트콩들 정글에서 움직이지도 않고..버티더라...결국 후방 지원 받고 빠져 나왔다... 대략 이런 이야기...

 

전쟁 영화 보면 미군이 베트콩 고문하면서, 불어... 기지가 어디야...이레도 안부는 장면 많이 보셨을 겁니다. 죽인다고, 때려도 신음 소리 안내는 민족입니다.

 

실제로 저희 공장에서 한번씩 다치는 직원들이 나옵니다. 손가락 끝마디가 조금 잘렸습니다. 엄청난 고통일건데..다꾸매고 돌아올때 까지 신음소리 한번 안냅니다.........독한넘.....이넘만 그런줄 알았는데.. 대부분이 그렇더군요...

 

그리고, 거래처 방문 한다고 지나가는데...버스 정류장에서 약 6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봤습니다. 식당 같은데 가면 뭐 하나 시키면 올 생각을 안합니다.  한국분들... '야. 빨리 가지고 와...뭐하냐..' 욕하고 난리 지기는 사람들 많습니다. 혈압 올리지 마시고 기다리세요....화장실 가서 손씻고...식당 구경하고...옆에 사람 뭐먹나...한번 보고...그래도 지루하면..아무나 붙들고 노가리나 까세요...보체고, 야단 친다고 빨리 되는것 없더군요... 여긴 베트남 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 찌게 하나, 숟가락으로 같이 떠먹는다고 외국인들 이해 못하겠다고 하는거랑 똑 같습니다.

 

길에서 차가 길을 막고 갈수가 없어도 아무도 항의 안하고 기다리고, 도로 공사 지연 되어 먼지가 펄펄 날려도 언젠가 하겠지 하며 기다립니다.

요즘은 저도 기다립니다. 익숙해진걸까여..아님 포기한걸까요.. 전 그냥 이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저런 여유가 부럽기도 하구요... 설마 나에게도 야생의 피가...존중 해야 될 부분은 존중하고 이해 할건 이해하면서 살아야지...식민지 시대처럼 지배를 할려고 하면 안될것 같군요...

 

 

두번째, 베트남인들은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지인들 자존심 정말 강합니다. 내가 낸데..이런식이 아니고 우리 한민족 자부심 비슷하게 자리잡고 있죠.. 이런 부분은 안건드리는것이 좋죠... 쓸데없이 자존심만 있고 능력없고, 책임감도 없는 넘이 있습니다. 자기 없으면 회사가 안돌아간다...난 정말 중요한 넘이다.....난 소중하니깐요.....정말 능력이 있어도 자존심이 너무 강한 넘은 나중에 꼭 사고를 치면 수습이 안됩니다. 죽어도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넘이 없어도 공장 돌아 가더군요...

 

어느날 조장급이 갑자기 그만 두는 바람에 반장이 임시로 조장 구할때 까지 일했는데.. 일은 열심히 했지만, 약간 기술과 인원 관리가 좀 부족한 넘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너 일 잘한다. 임시지만 니가 조장이다. 관리 잘하도록 해봐라..하고 다독 거렸죠.. 이넘 밤에 남아서 지가 공부하고 시키지도 않은것 다 알아서 하고..일깔끔하게 처리하고...결국 조장 되었죠...그래도 불안해서 조금 나태한것 같다면 니 다시 꽁년할거야, 조심해..이러면 알아서 합니다. 덕분에 좋은 넘 찾은거죠...또 이상한 이야기 한다...아무튼 자존심이 강하지만 그 자존심을 이용(?)하면 조금더 관리 하는데 도움이 될수도 있습니다.

 

아 중요한점 애들 때리지 마십시요...현지인들끼리는 일못한다고 머리 막 때립니다. 하지만 외국인이 때리면 베트남 인민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베트남인들은 가족중심이다.

 

현지인들은 제일로 치는것이 가족입니다. 일순위 가족,  이순위 돈,  삼순위 자기자신,  그다음이 회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평생직장 가족같은 회사 이런 의미가 없죠... 사장이 자식을 엄청나게 나아서 사돈 팔촌까지 같이 일한다면야...가능...

 

어느날 갑자기 안 나옵니다. 이유는 애가 아파서, 마누라가 아파서, 자식 학교 마칠 시간이다...이유야 많죠.. 한국에서 회사에 충성하고자 자의 타의에 의하여 오신분들이라면 이해를 할수 없을 겁니다. 저또한 이해를 못했죠... 하지만 지금은 이용(?)합니다.

 

우리 회계장 월급 많이 받습니다. 800만동 정도 받는데.. 어느날 돈을 가불 해달랍니다. 워낙 조용한 넘이라 그냥 해줬죠... 나중에 이유를 다른 직원에게 물으니 아기와 엄마가 담이 무너져서 많이 다쳤답니다. 아.. 그렇구나..하고 가만히 보니 몇일뒤, 이넘 오토바이도 팔고 고물로 교체되었더군요....며칠뒤 아기가 수술받는다고 일찍 간다고 하길레...불렸죠 돈때문에 후회 할짓 하지마라.

 

아기가 잘못되면  두고 두고 후회한다. 돈 필요하면 이야기 해라. 다 지원 해주것다...부모는 돌아가시면 후회하지만 자식은 평생 후회하며 산다....수술비 거의 지급했습니다. 큰 수술이라 좀 많이 들어 갑디다...ㅜㅜ

 

그리고 우리 인사과 직원 5월에 결혼 했습니다. 결혼식장에 회사 축의금만 주었지요... 회사의 바쁜일 끝나고 부인이랑 고향 갔다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다 가라... 나가고 나서 한시간뒤에 그넘집 앞에 가서 고향가는데 부모님께 맛난거라도 사들고 가라.. 얼마 찔러 주었습니다. 지금 위에 두넘 회사에 목숨겁니다. 직원들 하고 월급 문제로 티격태격하면서 올려줘봐야 서로 짜증납니다. 그냥 한번에 지르면 특히 가족문제 있을때 주면 효과 3배입니다. 애 낳았다 그러면 분유 하나 사다주고, 생일이다 그러면 모자라도 하나 사주면 그렇게 좋아라 합니다.

 

 

 

네번째, 우!우! 정말이야 ~~ 내겐 비밀은 없어...

 

여기 사람들은 비밀이 없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해도, 이건 다른사람한데 말하면 죽어...이래도 내가 다른 사람한데 말하지 말라고 한것까지 다 말해버립니다. 또한 한번 통성명 하거나, 아는 사람 누구의 누구다..이러면 몇년된 친구 저리 가라입니다. 니 저사람 잘아나..아..잘알죠...그래? 어떻게 아는데?...제친구의 친구 아닙니까....ㅡ,.ㅡ;;;

 

닝기리 니 이론이면 케빈베이컨 처럼 몇다리 건너면 전세계 인구가 니 친구것다...나도 니친구냐?......많은 분들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직원만 좀 편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또한 감정을 가진 동물인지라... 누굴 감싸고 하면 바로 소문 납니다. 아니 소문을 냅니다. 직책에 맞겠끔 대해주면 됩니다.

 

 

 

다섯번째,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현지인들 정말 잘웃고, 잘 부끄러워하고, 잘 기뻐하고, 잘 화내고, 잘 삐지고, 잘 미친척(?)하고....한국사람들은 무뚝뚝합니다. 저는 경상도이기에 더 무뚝뚝하죠...좋아도 어. 싫어도 어, 미워도 어, 귀찮아도 어....이런 스타일이죠...여기 현지인들은 좋으면 좋다고 동네방네 뛰어다니고..싫으면, 바로 싫다고 이야기하고, 난 니가 미워 하면 그날부로 인연을 끊어 버립니다.

 

하지만 표현이 강해서 그런지 뽀려가는거라던가...이런거도 표현을 잘합니다....ㅡ,.ㅡ;;; 맘에 안든다고 회사가 좀 잘 안해준다고 데모로 바로 표현을 해 버립니다. 다른 사람한데 화난다고 바로 표현을 해 버립니다. 화가 많이 날수록 출혈도 많더군요... 표현하는거 보고 애들 뭐야~~~이렇게 보지 마시고, 같이 동참(?)하십시요... 

 

글로 현지인들에 대하여 모든걸 나타낼순 없겠죠...베트남에 가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인원 관리에 힘들어 하시더군요...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죠....

 

너무 안좋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점만 생각하시면 좋은일만 생길겁니다. 이해 할건 이해하고, 이용할건 이용하면 됩니다. 덥고 바람도 없고,,,무슨 불을 그렇게 질러 대는지 목이 따갑습니다.

 

 

 

 

 

 

 

 

 

12.한국에 대한 베트남인의 생각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한국인을 싫어하진 않는지 묻는 사람이 많다. 어려운 질문이다. 특정 국민이 다른 국가나 국민에 대하여 갖는 이미지를 결정하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베트남인은 한국을 베트남 전쟁은 물론이고 최근의 교역관계, 현지한국기업의 경영방식, 이주노동, 국제결혼, 한류 등과 관련하여 복합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지에는 한국인을 싫어하는 담론도 좋아하는 담론도 동시에 존재한다. 한국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베트남인이 한국을 인식하는 방식과 비교해 볼 때 이웃국가에 대해서는 좀 더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특히 베트남인 외교관이나 엘리트 지식인을 만나보면 이런 점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베트남인이 이웃국가들과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관계를 맺고 갈등하면서 가지고 있는 집단적 기억과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에 기초한 정치심리는 외교적 결정을 하는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13. 이웃 국가에 대한 베트남인의 생각

 

베트남인에게 가장 가깝고 믿을 수 있는 나라를 하나만 선택하라면 라오스를 지목한다. “항상 웃고 태평스러운” 성격을 가진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라고 믿는다. 베트남인은 또한 자국이 라오스를 역사적으로 원조하고 후원해왔다는 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라오스를 “착하지만 못살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하는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경제성장 이전에는 정치적 동맹국으로, 경제성장 이후에는 경제적 후원국으로 라오스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이 이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한데는 라오스가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패권에 도전하지 않고 순응했으며, 민족문제나 국경문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형재애”를 강조하는 베트남인의 시각에 “동생”으로 취급받는 라오가 온전하게 동의하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라오스와 대조적으로 베트남인은 캄보디아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라오와 달리 캄보디아인은 타인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고 “신뢰를 저버릴 수 있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양국이 봉건시대부터 지금의 베트남 남부를 놓고 영토경쟁을 벌였으며, 1970년대에는 베트남이 일시적으로 캄보디아를 점령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의 애증관계는 이해할 만하다. 최근에는 캄보디아가 베트남보다는 중국이나 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어 양국의 불신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베트남인은 캄보디아를 “가깝지만 믿을 수 없는”이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태국에 대한 베트남인의 이미지는 양분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 이후부터 1990년 이전까지의 시기를 경험한 세대는 태국과 베트남의 오랜 긴장관계를 기억하고 있다. 반면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는 태국을 잘 사는 이웃으로 간주하고 관광, 스포츠를 통하여 태국을 인식한다. 흥미로운 것은 태국을 싫어하는 베트남인이 많지 않은 반면에 태국인이 베트남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믿는 베트남인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베트남인이 동남아시아 내에서 양국이 경쟁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캄보디아나 라오스를 우월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태국에게는 경쟁심리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의 젊은 세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실력을 가진 태국과의 축구경기가 가장 큰 이벤트이다. 베트남인의 태국에 대한 이와 같은 이미지는 양국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해 온 역사적 맥락과 잘 어울린다. 양국의 관계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수와 아세안 가입 이후 빠르게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경문제와 민족문제를 놓고 갈등하고 있다. 양국 모두 외교 다변화를 외치고 있지만 베트남인이 태국인을 대상으로 느끼는 경쟁심리는 깊은 역사적-지정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베트남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나라도 있다. 중국이다. 베트남인은 중국인이 항상 “잘난체하고 통제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교활한” 방법을 쓴다고 의심한다. 이처럼 베트남인이 중국인을 싫어하는 데는 이해할 만한 근거가 있다. 베트남의 “부정적 역사 속에는 항상 중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봉건왕조들이 벌인 큰 전쟁만 12번이나 되고 1970년대 말에도 양국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요즘도 종종 “스프레틀리 군도(Spratly Islands)"를 둘러 싼 영토분쟁이나 무역 분쟁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베트남이 중국의 커가는 힘을 의식하여 관계개선에 힘쓰고 있지만 중국은 베트남인에게 “여전히 가깝고 두려운”존재이다.

 

베트남인이 이처럼 이웃 4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베트남이 상대국가와 맺어 온 역사적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트남인은 이웃 4개국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힘의 균형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어떤 국가에 대해서는 승리자이고 어떤 국가에 대해서는 희생자라는 믿음이 있다. 이런 믿음 속에서 순응하는 약자(라오스), 저항하는 약자(캄보디아), 갈등하는 경쟁자(태국), 순응시키려는 강자(중국)라는 위계적으로 배열된 이미지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가 베트남의 동아시아 외교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14. 베트남인의 인간 의식

 

한국 문화와 베트남 문화는 동방 나라의 사회와 사상 흐름에서부터 형성되었으니 공동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그중에 특히 가족 주의와 집단 주의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한국처럼 가족주의가 강하지 않지만 가족 항상 제일 먼저 중시된다 옛날부터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 사회  사상  가족안 서열  각자의 피에 점점 깊게 스며졌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항상  모셔야 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존경한 마음으로 매년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조상과 선인들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가능하면 가장 성대하게 제사를 치를  있었으면 합니다한국 가족과 같이 베트남 가족들은 세네 세대가 함께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지금 현대적 빠른 사회에서 점차 적어 집니다.

 

 대신에  가족의 형태는 보편해지며 서구화  경향이 있다고   있습니다특히 인구가 많은 도시에는 이를  보여 줍니다그런데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은 가족을 향한 마음입니다 때나 명절 때나 어디서나 흩어지고 있는 베트남인들이 무슨 일이라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가족과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외냐하면 무엇보다 가족만큼  편안하고 따뜻한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한국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인의 우리라는 의식을 점점 제가 이해하게 되었고 베트남 사회를 보면 한국인의 우리 의식과 비슷한 집단 의식도 매우 강한 것을 느낄  있습니다긴시간동안 전쟁으로 인한 아픔 있는 베트남 민족에게 아무나 민족 자랑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있습니다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인들을 이겼을  있기에 베트남인끼리 단결성과 공동체 의식도  요소입니다

 

쉽게 말하면 평소엔 같은 학교 학생같은 회사 직원이나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항상 집단의식을 갖고 서로 연결하고 협력 관계를 맺습니다또한 특히  기업 안에 집단의식은 흔히   있습니다 한국 기업에서 실습생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제가 한국인 상사와 베트남 직원들의 관계를 직접 체험해 보았으니 어느정도  집단의식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기업들과 경쟁할  자기 기업의 제품을 질을 향상하기 위해 모든 직원들이 같이 마음을 먹고 동심으로 일을 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도 갑자기 따뜻해집니다다만 집단 주의의 단점은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약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체에서 개인 의사 소통은 쉬운 일이 아니고 실수가 나면 개인 책임을 정하는 것도  될지 모릅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지리 거리가 가깝지 않데다 경제력 차이가 있는 것을 불구하고 문화와 사상에 대한 공동점이 존재하고 인간의식도 비슷하는 것은 양국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에  중요한 바탕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15. 베트남인이 못사는 이유

 

베트남에 와서 문득 문득 느끼면서 살지만 우리보다 30~40년 뒤쳐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이 가난하다고 해서 우리보다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시각에서 보았을 때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잘 살았으면 좋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또 베트남에 몇 년 사셔서 베트남을 이해하시는 분들도 가끔 던지는 질문이 "베트남은 자원도 풍부한데 왜 못살까" 입니다. 최빈국의 나라에서 올해 1인당 국민소득 1,300달러선인 베트남, 특권층만이 과분하게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게 가난한 베트남!!!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쓰레기통을 뒤적이는 사람들, 빵가게 앞에서 빵을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복권을 파는 아이들도 거리를 나가면 쉽게 볼수 있는 광경입니다.

 

원래 베트남인들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동남아로 이주해 오면서 베트남 북부 일부와 중국 양쯔강 이남(화남)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 민족입니다. 그 이후 반랑국(BC690), 어우락국(BC257), 화남지방을 어우르는 남비엣(BC207)이라는 나라를 이룬 강성한 시기가 있었으나 유방이 세운 한나라에 멸망하면서 약 천년간 중국의 지배하 있으면서 중국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972년에 리왕조가 들어서면서 중국으로 독립하게 되어 200여년 왕조를 이어가고, 레왕조에는 중흥기를 맞이 하며 원나라, 명나라를 물리치게된 시기였습니다.

 

17세기 레왕조는 몰락하고 남북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떠이선家 출신들의 난에 의해 남북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를 세우지만 불란서의 도움을 얻은 응웬家에 의해 무너지고 응우웬 왕조는 남북을 통일하게 됩니다. 중화사상에 빠진 응웬 왕조 두번째 왕인 민망왕이 불란서의 이권을 빼앗고 탄압하자 불란서는  군대를 보내 다낭을 점령하고 사이공, 메콩델타를 차례로 점령하여 불란서의 90년간의 식민지에 들어갑니다.

 

베트남으로 부터 불란서는 수탈과 착취, 문화강요가 계속 이어져 저항이 거세지지만 불란서의 식민정부에 협조한 일부 친불파들은 권력과 부를 얻게 됩니다. 이들이 나중에 남부 베트남공화국의 주도세력이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와 비슷합니다.

 

1946년 베트남 독립군과 인도차이나 민족해방군과 불란서 군의 전쟁이 시작되어 54년 디엔비엔푸에서 불란서 군이 대패하여 독립을 이끌어 내지만 베트남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기간 전쟁으로 인한 베트남쪽 인명 피해는 사망자 300,000명이상,부상자 500,000명 이상, 포로 100,000 이상 되었습니다.

 

독립된 베트남은 독립전쟁에 앞장선 호치민이 이끄는 북은 베트남 민주공화국, 친불파들이 이끄는 남은 베트남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지만 공산화 확대를 우려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고의로 조작해 전쟁을 일으켜 8년간의 베트남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의 무자비한 폭탄을 투하해 도시, 공장들을 초토화시키고 화학약품인 고엽제를 투여하여 민간인 1,581,000명, 군인 830,000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177,000명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친중국인 캄보디아 정권과 폴포트의 베트남계 숙청으로 발발한 1978년에 베-캄보디아 전쟁은 베트남 군인 1만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친중국 캄보디아를 친러 정부인 베트남이 점령하자 중국은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하여 베-중국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전쟁으로 베트남은 한개 도시가 파괴하고 민간인 1만명, 군인 2~3만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현대사에 60여년 만에 4번의 큰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는 상상할수 없게 되었고 베트남전쟁과 호치민의 휴전 파기는 서방 세계, 민주국가로 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모든 분야에서 외면을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또한 최초의 공산국가 간의 전쟁이였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공산주의 국가들로 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하게 되고 지원문제에 가장 절실했던 중국과의 전쟁으로 동맹국들로 부터도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전쟁과 외부세계에 대한 고립은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진 부유한 나라지만 이를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베트남은 세계 최고의 빈국(1인당 국민소득 800불)로 국민들에게 비참한 생활과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식 대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외치며 국민을 독려했지만 한계를 느낀 베트남 공산당은 80년이후 도이머이로 인해 화해와 개방의 물결로 외부자본이 점차 들어 오게 되어 공장과 도시, 도로, 항만이 건설되어 최근에는 모든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고질적인 병폐와 한계, 외국 매판 자본과 외국 문화에 대한 경계, 부정부패 만연, 빈부격차, 남북 지역감정, 책임감부족, 느린 행정, 게으름 등이 베트남 발전을 더욱 더디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조금씩 변화를 하고 있습니다. 2012년 현재 베트남의 무역량은 500억달러 수준(40위권)이고 1인당 국민소득 1,300불 수준에 이르는 나라로서 전국이 공사현장이라고 할만큼 신도시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습니다. 인구 1억에 육박하고 인구의 70%가 30대이하의 젊은 층이다는 것, 쌀, 석유 및 석탄, 수산물, 목재 등 부존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 국민들의 애국심이 타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것.

 

여러 연구기관에서 7년후인 2020년 베트남은 1인당 GDP 3000~4000불에 육박하고, 2050년 베트남은 구매력기준 GDP 30위권에 진입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베트남의 미래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16. 베트남인의 종교

 

베트남의 종교는 수많은 토착 정령들에 대한 숭배의 신앙 위에 유교, 도교 및 불교의 세 종교가 혼합되어 이루어졌다. 베트남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혼합형태의 종교를 믿는다. 그러나 계층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은 다르다. 학자와 관리 계층은 유교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일반 민중들은 불교, 도교 및 정령숭배의 신앙에 보다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도교는 베트남에 유입된 후 그것이 갖는 본래의 철학사상은 약화되었으며 조직적인 종교체계의 형태도 갖지 못했다. 마술이나 주문 같은 신비주의적 요소들만이 토착 정령신앙과 결합되었다. 터이팝(Thay Phap)으로 불리는 점술가, 점성가, 역술가 및 신유은사자들은 이러한 혼합형태의 신앙으로부터 유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트남의 불교는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이 갖는 상좌불교의 구원교리인 개별구원과는 다른 집단적 구원의 경지를 허용하는 대승불교의 계통이다. 경전에 관한 지식의 습득보다는 개인이 스스로 마음과 육체를 단련시키며 덕을 행하고, 점차적이 아닌 갑작스런 깨달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베트남의 불교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닌 도교의 요소들과 쉽게 혼합될 수 있었다. 따라서 10세기까지 베트남 사람들은 정령숭배의 신앙적 요소들 중 어느것도 버리지 않고 독실한 불교신자가 될 수 있었다.

 

 

 

 

 

 

 

 

 

 


17. 베트남인의 유교전통


유교가 정치 사회적으로는 공헌, 능률 및 상벌을 강조하는 정부의 통치철학이 되었다. 이는 종전에 왕과 귀족층이 불교의 영향력을 통하여 무력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통치유형을 대신한 것으로써 무력 대신에 교육이 모든 권력으로 이르는 통로가 되었다. 엄격한 윤리교육은 왕과 신하 사이는 물론 모든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위계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유교가 베트남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딘 것은 15세기의 레(Le) 왕조가 성립되면서부터이다. Le 왕조의 국가정책은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특히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세력들을 진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무엇보다도 지방 세력의 본산인 마을 단위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위계적 서열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하여 가족 내에서의 인간관계가 먼저 변화되도록 했으며 그것이 보다 큰 사회 단위에 확장되어지게 함으로써 통치에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고자 했다.

 

실제 유교 체제가 본격적으로 강화되어지는 시기는 17세기 중반부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장기간 계속된 내란 때문에 혼란해진 사회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그 후 18세기 초부터 유교식 체제는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마을은 조정으로부터 직접 간섭을 받게 되었다. (Yu 1990: 123~135)

 

비록 마을 지도자들이 그들의 고유 전통을 끈질기게 고집함과 동시에 조정에 대해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의 중국식 유교 전통이 이식되어질 수는 없었지만 조정으로부터 비교적 지리적 왕래가 용이한 중.북부 베트남의 평야에는 마을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유교적 가치가 강하게 침투되었다. 평민들의 경우, 원칙적으로 마을의 전통관습을 고수했지만 그들도 유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시험에 불합격한 유생계급들이 자기 고향 마을에서 민중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을 유교식으로 교육시켰고 그에 따라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라도 자식을 유교식 학교에 보내면서 관리에 등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유교식 통치체제는 응웬 왕조가 집권하면서 더욱 강화되어 베트남 사회의 저변에까지 유교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18. 베트남인의 가족제도

 

 

북베트남의 가족제도

베트남 가족의 혈통원리는 부계를 따르며 권위는 부권적이며 혼인 후 거주규정은 부처제로 되어 있다. 또 부계 확대 가족 중에서도 전체적 확대인 중국 가족과는 다른 직계가족을 이루는 단계적 활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가족의 목적은 중국식 확대가족처럼 가족확산이 아니라 장자를 통한 가계의 계승을 영속시키는 데 있다. 모든 아들 중 장자에게 특별히 가계계승의 특권이 주어지고 형제들은 교대로 가장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Nguyen Tu Chi 1991: 62~62)

 

베트남 직계가족의 핵심 내용은 조상제사의 가치가 다른 것들 보다 우선하는 경향을 가진다. 특히 제사권이 재산권 보다 상위에 있으며 제사를 통하여 조상과 후손이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로써 장자를 통해 가문의 계승은 이루어지고 祖孫이 일체가 된다.

 

상속에 있어서 베트남은 남녀 차이 보다 적서의 차이가 심하고 중국의 경우는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짜게 먹으면 자식이 목마른다(doi cha an man, doi con khat nuoc)'라는 속담은 베트남인들의 사회적 관계의 단위가 개인보다는 가족에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Jamieson 1981: 256)

 


남부 베트남의 가족제도


17세기에 이르면서 베트남인들은 북쪽으로부터 남진하여 메콩델타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의 북부 타일랜드와 남부 라오스의 지역으로부터 메콩델타 전역으로 흩어져 살았던 크메르인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베트남인들의 메콩델타로의 이주는 남.띠엔(Nam Tien)이라는 북부 베트남의 정책에 의해 시도되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은 만주정권을 피해서 또는 새로운 상업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도착하여 메콩델타에까지 유입되었는데, 베트남인들 보다 먼저 왔거나 거의 같은 무렵에 도착하였다. 중국인들은 이미 17~18세기에 비엔.호하(Bien Hoa)나 미토 등지에서 대량의 인구를 가진 종족집단이 되었으며, 또참(Cham)인은 베트남인들이 남진을 함에 따라 중남부의 거주지를 버리고 메콩델타에까지 밀려 정착하게 되었다.

 

북부 홍하 델타가 수리관개 시설에 의해 벼를 재배했다면 남부의 메콩델타 지역의 벼농사는 자연 조절되는 물의양에 의존했다. 정착유형에도 차이를 보여 북부에서는 농토로부터 분리된 약간 높은 지역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는 제방사업 및 물의 관리에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대규모의 노동력이 없이도 소규모의 가족 단위의 노동력에 의해서 벼농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남부의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남부에서의 이러한 정착유형은 친족체계와 마을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친족간의 관계의 연망은 북부 홍하 델타에서처럼 넓지 못하고 18세기까지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마을이 발달되지 못하여 북부처럼 마을 소유의 공전(communal land, 公田)과 딩(dinh, commual temple)도 없었다. 주로 핵가족 형태의 개별가족이 하나의 독립된 사회적 단위로서 많은 토지이용의 자유를 누렸다. 이러한 남부의 상황이 형성되어지는 데 기여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북부에서 남진한 이주자들이 주로 떠돌이 농민, 탈영병, 탈옥수 및 가난한 선비들로서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그들로 하여금 좁은 친족의 연망 속에서 대부분 핵가족 단위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가족 재산에 대해 부.자 공동 소유 원칙을 따랐던 중국과는 달리 15세기  베트남의 가족전통은 남편, 부인, 자녀들이 개별적으로 재산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서 자녀의 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이 요구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가부장권의 성향보다는 부부 중시의 가족에 가까웠음으로 부부 및 모든 자녀들이 평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남부로 이주한 사람들이 중.북부의 고향 마을에 있을 당시는 여전히 유교의 영향이 강하지 못했던 시기로 보여지고, 더욱이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주로 하층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보다 평등관계에 기초한 전통가족 제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평등한 자녀간의 관계와 개별화된 행위 성향이 약화되어지고 동시에 부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을 19세기 응웬 왕조의 통치의 산물로 보여진다.

 

 

 

 

 

 

 

 

 

 

 


 

 

 19.  베트남인의 전통 문화 변화


19세기 후반 남부 베트남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영향이 미치게 되면서 베트남의 사회.문화전반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베트남인들의 우주론적인 질서의 파괴는 프랑스인들의 진화론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인들은 그들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베트남을 근대화시켰다. 그 중에서도 마을 행정의 합리화를 제일 먼저 시도했다. 토지는 시장경제에 의해 통제되는 합리적인 자본주의 제도 내부에서 상품으로 이용되게 하였으며 국가가 인정하는 개별 소유권 제도에 의해 통용되도록 했다.(Bassford 1987).

 

이러한 프랑스에 의하여 유입된 자본주의 제도는 전통사회의 제도와 갈등을 빚게 되었고 두 체계 모두 본래 대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문화체계는 상호 작용을 통하여 베트남사회를 하나의 근대적 사회로 변화시켜 갔다. 모든 지역에서 계층에 관계없이 베트남 사람들은 서구의 교육제도를 수용하게 되었고 서구의 상품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식민지 정부의 관리가 되거나 상업활동에 관계된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가족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으며, 모든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도 지위 경쟁의 성향을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도시에는 중산층이 생겨나고 그들은 식민지 행정부와 경제적으로 면밀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새로운 지위, 이상 및 열망들을 갖게 되었다. 많은 식자층들은 19세기 서구의 진화론적 사고체계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특히 그들은 근대 세계에서 유지해야하는 국가적 자존과 위엄을 가지기 위해 베트남의 문화를 재형성시키를 열망했다. 그들은 근대 세계에서 사회적 지위 향상은 서구식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어, 철학, 지리 및 수학을 공부함으로써 유교적 가치에 근거를 둔 위신에 따른 전통사회의 성공 기준을 대체시켜 나갔다. 그들은 물건이든 문화적 산물인 문학작품 또는 철학이든 프랑스에서부터 온 것이면 모두 베트남 토착의 것들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취급하였다.(Jamieson 1991:16)

 

전통 마을에서의 지위, 부 권력은 더 이상 큰 효력을 가지지 못했다. 가치의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미덕과 학식과 위신을 판별하는 기준이 모호하게 되었다. 변화가 가장 민감하게 나타났던 영역은 가족주의 이념에서였다. 프랑스식 학교 교육으로부터 나타나는 개인주의적 가치의 영향이 이러한 전통적 가족주의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개인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베트남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 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식민지 세력에 저항하는 공산당에 의한 혁명운동의 시작이었다. 1940년대에 이르면서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어떤 민족주의 단체들 보다 큰 호응을 받았으며, 특히 전통문화와 서구문화와의 갈등이 매우 첨예화되었던 중부 및 북부지역에서 대대적인 설득력을 얻었다.

 

전통문화의 가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치가 상호 일치하는 부분이 이러한 호응을 얻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적이며 서구적인 이념이지만 유교적 가치가 침윤되어 있는 전통 베트남의 사회.문화 체계의 많은 요소들에 부합되었다. 베트남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옛것과 새것간의 갈등, 아시아적 삶의 방식과 서구적 가치간의 갈등 및 가족의 내부에서 배웠던것과 프랑스식 교육제도 속에서 배웠던 것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전통유교 사이에 공유되어지는 도덕적 가치 중 하나는 개인의 권리를 집단과 사회 자체의 가치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 둘은 모두 자본주의에 반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상업활동 보다는 오히려 생산과 자기수양에 강조를 두는 가치를 공유한다. 상거래에서 값을 깎거나 타인에게 빚 독촉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체면과 위신을 하락시키는 일로 간주되며 마을의 식자층들이 그렇게 할 경우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게 되어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상업행위에 반하는 이러한 전통사회의 유교적 가치에 대하여 새롭게 이론적인 공정성을 부과, 합리화 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서구주의자들에 못지않게 주장해 온 서구적 모델 중의 하나는 과학과 기술이었다. 과학과 기술은 베트남이 발전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로 간주되었으나 모든 민중 신앙들은 미신으로 취급되면서 베트남의 발전에 큰 장애 요소로서 부각되어졌다. 공산당의 목표는 경제체계나 사회체계의 부분들을 변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가지지 않고 사회 전체를 변화시켜 새로운 인민을 창조해낸다는 데 있었다.


 

 

 

 

 

 

 

 

 

 

20. 베트남인의 사회주의 국가 발전전략과 문화


베트남에 사회주의가 실현되면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진 것은 생산수단의 집산화였다. 따라서 1960년 말 무렵까지 북부의 홍하 텔타의 농지는 거의 모두가 코페라티브 체제와 함께 집산화의 생산과정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 베트남의 마을단위를 너머 확장되어지지 않고 지역 공동체의 사회적, 영토적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974년에 이르게 되면서 공산당은 대규모의 사회주의 생산체계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과학적인”인 일의 조직을 강조했으며 그 일환으로 이전 보다 더 큰 생산단위를 만드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로써 당의 정책은 전통 마을에서 유지된 생산방식을 포기하고 강도 높은 작업, 일의 전문화 및 협동을 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보다 합리적인 방법에 의한 생산의 증대를 이루어 내려고 했다. 진보적인 경영관리라는 명목하에 실시되는 이러한 생산체계에 있어서의 변화는 전적으로 중앙 정부의 관료제적 방식에 의해서 계획되고 통제되는 것이지 농민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산방식에 의한 결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경작의 장소와 노동력의 분배와 가축 사용 등에 관한 모든 결졍이 중앙에서 이루어지도록 되었다. (Nguyen Duc Nhuan 1984)

 

생산체계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가 북베트남 사회에 가져다주는 영향들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대규모의 농업집산화에 의해서 전통 마을들이 보다 큰 규모로 통합되면서 본래의 문화적 가치가 약화되는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형성된 새로운 거주 공동체 정신을 창조해내기가 쉽지 않으며 생산성의 향상은 본래의 지역 전통 문화의 가치가 고려되어질 때 실혈될 수 있는 것이다.

 

남부베트남의 경우는 또 다른 그리고 보다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었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된 바로 직후 남부, 특히 메콩델타 지역에도 농업의 집산화 정책이 강행되었다. 호찌밍시의 남쪽에 위치한 메콩델타는 베트남 배의 비옥한 토지의 1/3을 점유하고 있었다.

 

앞서 전통사회의 내용을 소개할 때 언급된 대로 메콩델타의 시골 마을들은 폐쇄되어 있지도 않고 공동체로서의 기능도 북부에 비해서 판이하게 달랐던 지역이다(Rambo 1973). 이곳 남부 델타 지역은 마을 사람들끼리의 협동과는 크게 관계없이 개별가족 단위로도 농업 생산이 가능한 곳이며 기근과 홍수가 많은 북부에 비해서 훨씬 부유하며 이미 토지개혁 프로그램도 성공적으로 이루진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사람들은 장기간 동안 프랑스에 의한 서구적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후 미국의 영향하에서 1945~1975년까지 개인주의적 생활방식을 내면화시켜 왔다. 따라서 그들에게 농업집산화의 방식은 북부에서 보다 훨씰 낯설은 것이었으며 그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집산화에 의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한 경험을 이미 갖고 있었기에 구태여 집산화의 방식을 따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당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었고, 또 북부에서처럼 기근에 대한 불안도 거의 없는 메콩텔타 사람들은 필요한 양의 식량 외에는 더 많은 생산에 대한 동기를 갖지 못했으며 오히려 쌀의 잉여분이 있을 경우 가축을 위해 이용하거나 술을 만들어 먹는데 활용할 따름이었다(Duiker 1985). 집산화운동에 대한 남부인들의 저항은 강력했고 따라서 사회주의 정부가 남부에서 계획한 집산화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비록 연료와 화학비료의 부족, 기후적인 영향 및 관료제적 농사지침 등의 문화 외적 영향에 의한 것도 있지만 이러한 집산화의 실패는 주로 문화적 영향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인구 재비치의 정책은 또 하나의 사회주의 베트남에서의 농민문화의 가치와 상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베트남 당국은 인구의 합리적인 분배를 강조하면서 사회주의 베트남 건설 이후 20년 내에 천만 인구를 재배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남부 도시 지역의 인구를 신경제지구 및 고산지대로 이동시켜 생태계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생산을 증대시키며 또 한편 고산지대의 소수종족들을 계곡으로 이주시켜 화전농업 대신 산업작물을 재배하게 하는 정책을 수행했다. 이러한 목적 하에 1987년까지 사회주의 정부는 약 300만명 가량의 인구를 재배치시켰다.

 

고지의 화전경자들을 계곡으로 이동시켜 강제적으로 정착 농경을 하게 하고 북부평야의 농민들과 남부의 도시민들을 중부 지역의 고산지대에 이동시켜 산지 화전농에 투입시켜 상업작물을 재배케한 정부의 정책은 문화, 생산기술 및 환경 사이에 생겨날 불일치를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었다. 상호 간 문화 및 생태계의 차이는 숲의 파괴, 토양의 침식과 퇴화 등의 환경파괴, 저생산성 및 사회적 긴장을 초래했을 뿐이다. 동.나이 성에서의 경우, 자연 자원에 대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정도는 자원의 자체 유지수준을 훨씬 넘어서 버렸다는 연구보고도 있다(Rombo 1990: 10)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트남 공산주의 정부가 내세우는 과학-기술에 의한 국가 발전 계획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을 더 많이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적 문화요소인 과학기술에 일방적으로 의지한 국가발전 정책의 수행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들도 저지대의 사름들을 고지대로 이주시켰으며 과저 남부의 지엠(Diem)정권 역시 1950~1960년의 기간 중 토지 개발 정책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취했던 정책을 수행해 왔다.

전통문화 요소들의 고려 없이는 어떠한 경제 발전의 수행도 환경파괴와 생산의 감소를 초래할 뿐이다. 특히 소수종족들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을 인정해 주고 그들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유지해온 환경에 대한 적응방식을 고려하면서 취해지는 경제발전 전략은 다종국 국가인 베트남에서의 국가의 통합을 용이하게 하는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21, 베트남인의 정치


베트남의 국가조직은 두 가지의 중요한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헌법상 국가의 최고 주권기관이며 입법권, 행정권과 사법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국회(최고인민회의-헌법상 최고 주권기관)와 지역단위의 각급 인민회의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의 중앙행정기구와 지방수준의 인민위원회 및 각급 행정조직이다.

 

국회가 존재하지만 5년마다 열리는 공산당 대회가 국가 운영을 결정하는 최고 기관이며 국가와 당의 최고 인사는 국가주석 수상 공산당 서기장이다.

 

국가주석 - “대통령”의 지위이지만 실권은 적고 형식적인 존재이다.

수상 - 행정실무의 최고 책임자

공산당서기장 -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

 

국가기구로 입법, 행정, 사법부가 각각 구성되어 있지만 공산당이 권력의 중앙에서 하부까지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다. 국가기구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당은 당정책을 법률과 결정사항으로 구체화시켜 행정기구에 하달하고 국가기관의 핵심적인 직책에 당원을 임명하여 국가기구의 활동을 감독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의 통치구조는 크게 당과 행정기구에 의해서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표명되듯이 "당이 지도하고 정부는 관리하며 인민들은 집단적으로 권리를 행사한다."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당과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정치국은 국가기구의 주요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제계획과 운영, 안보유지, 외교, 당 조직관리 등의 중요정책을 다루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 권력의 핵심은 아직도 당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베트남 정치의 특색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개인독재의 경향은 없고 베트남공산당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정착해 있으며 독재 국가에서는 드물게 정치적 부패가 만연해 있다. 1980년대 및 1990년대 초, 이제는 국민들에게 고질적인 병폐로 여겨지기 시작한 부패를 척결하고 보다 젊은 인재를 진출시키기 위해 수천 명의 당원들이 축출되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은 연로한 관료들로 구성된 정부가 통치해 왔다. 베트남은 1995년 7월, 아세안에 가입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베트남 간의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22. 베트남인의 경제

베트남은 통일 이후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기반으로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추진해왔으며 집단농장 및 국영기업을 주된 생활활동 단위로 하는 중앙 집권적 계획경제를 운영해 왔다. 1975년까지 자본주의 경제를 시행해 왔던 남 베트남에 통일 후 급속히 계획경제체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본주의에 젖어있던 남부에선 적용이 잘 안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개인적인 활동으로 가정을 부양하려는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사유재산의 욕구가 급격히 부활되고 폐쇄정책에 한계를 느낀 공산당은 1986년 12월 제6차 전당 대회에서 도이 머이(쇄신:도이 - 변화, 머이-새롭다) 정책을 단행
하게 된다.

도이 머이는 한마디로
개방에 의한 국제화의 시장경제 도입
이다.


도이 머이에는 시장경제와 더불어 대외개방이라는 2개의 큰 주류가 있으며, 그 이외에는 일당제를 지지하면서도 당과 정부 기능 분리라는 정치 개혁도 단행했다. 즉, 전통적인 지도 주체인 공산당의 권위는 변하지 않고 그것을 기초로 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단행 이후
어느 도시에서나 상점, 레스토랑, 호텔 등 서비스업 분야가 크게 발전
하였으며 농촌에서도 전과 같은 공동작업은 없어지고 토지도 국가의 고유이긴 하지만 20-70년이라는 기간 동안 개인의 사용권을 인정해 주었다. 1991년부터는 대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주택건축의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일반인들이 숨겨두었던 자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경제교류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 우선, 한국과의 경제 교류를 살펴보면 1962년 월남과의무역협정 체결을 계기로 통일 이전 경제교류를 활발히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1976년 4월 베트남 공산화로 대사관의 철수와 함께 외교 관계가 단절 되었으며,
통일 이후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교류는 중단되었다. 양국간 경제교류가 재개된 것은 1983년 이후로서 그나마 소규모 간접교역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1988년에 이르러 직교역이 이루어지면서 1992년 우리나라의 대베트남 수출이 1억 달러를 상회하는 등 민간 차원에서 베트남과의 경제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민간차원의 경제교류가 활성화함에 따라 교역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고, 직접투자 진출에 대한 민간 기업의 욕구가 증대됨에 따라 한국 정부는 1991년 대베트남 경제 제재조치 완화 및 경·협 확대 추진 방침을 발표하였다. 1992년 12월 말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양국 경제 협력은 본격화되고 있으며 경제 교류도 매년 확대되고 있다.


사회주의권에서의 개혁의 흐름은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 하고 있으며, 몇 몇 나라들이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미래의 사회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될 것인가 하는 전환적 모델로 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3. 베트남인의 역사


○ 베트남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전략적 차원에서의 침략으로 압축할 수 있음.

○ 그리고 베트남의 투쟁과 침략의 원동력은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음.

○ 베트남의 투쟁사는 자연 정복과정에서 시작되었고,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짐.

○ 이에 반해 자신들의 내부적 팽창요인을 해결하는 동시에 정치?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남쪽으로의 침략사를 남겼음.


 

 

 

투쟁하기


 

1) 자연과 투쟁하기

 

○ 베트남은 위도 8도 30분~23도 22분 사이에 위치하며, 기후 특징은 위도상의 차이보다는 고도상의 차이로 남부는 열대몬순기후에, 북부는 아열대기후에 속함. 이 때문에 남부는 건기(11~4월)와 우기(5~10월)로 나뉘어져 연중 여름인 반면, 북부에는 4계절이 있음.

○ 베트남 역사의 출발지로 오늘날 수도가 있는 북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통의 도시임. 북부가 이런 특징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의 운남성에서 시작하여 베트남을 관통하는 전장 1,200km(베트남 내에서의 길이는 475km)에 달하는 홍강이 있어서였음.

○ 홍강은 농업발전과 무역의 축으로 베트남인에게 중요한 삶터를 제공했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함. (중국은 베트남 침략루트로 매번 이곳을 사용) 이처럼 무궁무진한 자원으로서 긍정적 역할을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홍강의 또 다른 모습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금까지 베트남인의 무수한 재산과 생명을 위협해온 재난인 홍수.

○ 베트남은 강우량이 많을 뿐 아니라 시기별로 일정하지 않음. 이는 지형상의 특징에서 비롯한 것으로 해마다 강우량에 많은 차이를 냄. 이런 조건에서 홍강은 매년 무서운 홍수를 일으켰는데, 홍강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샛강이 많아서 우기 때는 홍수의 위력이 더함.

○ 때문에 베트남의 투쟁사는 중국의 침략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일 이전에 홍강의 홍수에 어떻게 대응하는냐가 우선시됨.

○ 홍수를 막는 일은 어느 일인, 일족, 일촌의 힘으로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음. 홍강의 제방은 모든 사람의 과제였으며, 475km가 좌우로 튼튼하게 연계될 때만 제 구실을 했음. 또 제방사업은 비가 1년에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것처럼 1년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으며, 수천 년을 두고 면면히 이어져왔음. 이 때문에 베트남의 역사를 가리켜 ‘제방을 쌓는 역사’라고도 함.

○ 홍강의 범람과 홍수를 극복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 외에도 베트남인들은 개발과정에서 일찍이 무서운 산짐승이나 정글과도 싸워야 했음.

○ 이처럼 베트남인들은 역사과정에서 자연과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북부 베트남인이 남부보다 각고면려(刻苦勉勵)하다고 하는 말에서처럼 베트남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북부인들이 자연과 벌인 싸움은 더욱 치열했음.

○ 홍강의 범람과 홍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방을 쌓고 또 무서운 짐승과 자연환경을 정복하기 위한 투쟁에서 베트남인들은 자연스럽게 광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의식은 인위적인 요인(외세의 침략)과의 투쟁에서 더욱 강화되고 조직화됨.

 

 

2) 인위와 투쟁하기

 

○ 베트남처럼 중국의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반도적 특징은 일찍부터 인류의 이동경로가 되어 다민족과 다문화를 낳는 요인이 됨. 반도적인 특징은 단순히 사람과 문화만의 이동경로로만 이용된 게 아니고 정치와 경제적 성격을 띤 숱한 침략의 경로로 이용됨.

○ 베트남의 민족은 54개로 분류되며, 다문화적 특징은 인종과 지역에 따라 3개의 유형, 즉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소수민족문화, 북부를 중심으로 한 베트남문화의 주류인 중국문화, 그리고 남부를 중심으로 한 남해문화(남해를 통해 들어온 인도문화)로 분류됨.

○ 중국의 베트남 침략은 진(秦)때부터 시작됨. 이는 지리적으로 국경을 같이하고 있던 중국의 침략에 대항해서 베트남이 일찍부터 투쟁을 해왔다는 뜻이 됨.

○ 중국의 침략 외에도 베트남은 쟈오주 서북쪽에 위치한 남조와 라오스, 남부에 위치한 찌엠 타잉과 캄보디아로부터 침략을 받았음.

○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선교와 상업성을 띤 서구 유럽인들의 베트남 진출은 지금까지 인접국을 대상으로 했던 투쟁과는 다소 다르게 나타남. 유럽의 침략은 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원료획득과 상품시장을 목표로 하는 다 낭Da Nang의 공격으로 시작됨. 이때부터 시작해서 1954년 7월의 제네바협정이 맺어지기까지 베트남은 약 100년 동안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프랑스를 상대로 투쟁을 벌임.

○ 이 가운데 베트남은 미얀마루트와 장개석 지원루트의 단절을 위해, 남방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타이와 말라이로의 작전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인도차이나 자체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으로 진격했던 일본과도 투쟁함.

○ 이어 베트남은 미국의 대리정권인 남부와 1975년 4월 30일까지 베트남전쟁을 치렀음.

○ 가장 최근에는 1978년 12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2월 국경선 1,400km에 걸쳐 남침해온 중국과 투쟁을 벌임.

○ 이와 같은 장기간의 투쟁사는 공동체를 생성 혹은 강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자긍심을 더한층 높여주는 기능을 했음.

○ 또한, 투쟁사가 가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군사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나아가 접전국과의 문화교류를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낳기도 했다는 점임.

○ 다른 한편에는 장기간의 투쟁사로 인해 유형문화재의 보존은 물론 발전에 큰 장애요소가 되었으나, 대신에 베트남인은 모두 화가요 가수라는 말이 나올 만큼 무형문화재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함.

 


 

 

3) 침략하기


 

○ 베트남의 침략사는 흔히 남진사로도 표현됨. 침략사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내부적 팽창요인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전개됨. 그러므로 베트남은 북으로는 중국의 장벽, 서로는 중국의 견제 및 지리적 장애, 그리고 실익이 적은 경제 요인 등으로 북진과 서진이 아닌 남진으로 점철됨.

○ 베트남인들이 남으로 가게 된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음. 먼저, 남북간의 치열한 대립과 분쟁에서 야기된 무리한 부역과 군역, 그리고 조세 부담으로 민중이 기본적인 삶에 위협을 느꼈다는 점임. 둘째, 값비싼 토지 임대료와 지주들이 토지 겸병임.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새로운 삶터를 모색하게 되었고, 이때 남부지역의 광활하고 비옥한 황무지가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으로 보였던 것임.

○ 침략사로 인해 베트남 남부는 중북부 지역의 전통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낳게 함. 이에 대하여 쩐 티 투 르엉은 “베트남 중북부 지역의 전통적인 마을의 특징이 정적이면서 규례?질서?전통?습속?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종족 혹은 집단중심이라면 남부 마을은 동적이면서 자원?의협?개인성의 개체중심적 특징을 띤다.”고 함.

○ 한편 베트남의 침략사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직?간접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분쟁 요인이 되고 있으며, 특히 베트남인들이 1978년 12월 22일 폴포트의 베트남 침입에 대한 자위권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캄보디아 침략은 현대사에서 힘의 논리에 입각한 베트남의 대표적인 침략사라 할 수 있음.


 

 

 

 

 

 

 

 

 

 

24.베트남인의 힘은 어디에서


○ 베트남인들이 타국의 침략에서도 독립과 자유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은 자연?인위와의 투쟁과정에서 생성?발전한 공동체라 할 것임. 이 공동체는 남북의 일반적 특징이 아니라 북부적인 것으로 고대 중국의 침략에서부터 20세기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실로 엄청난 힘으로 작용함.

 

○ 베트남은 다민족?다문화 국가임. 이런 경우 국가가 공동체성이 약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이론임. 소수민족들은 다수민족인 낀Kinh(약 85%를 차지하고 있는 통상적인 베트남족)족에 밀려 서북 산간지역에 거주함.

 

○ 역사 가운데서 눙Nung족의 반란과 같은 소수민족과의 첨예한 갈등도 있었지만 이와는 달리 공동의 적을 놓고 화합을 이룬 예도 많음. 몽고의 제1차 침입에 후퇴하던 몽고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던 일,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한 대불항쟁, 베트남전쟁에서 보여준 소수민족의 투쟁 등은 다민족이라는 특징을 가진 베트남인의 공동체성을 보여준 예가 됨.

 

○ 전통적으로 베트남인은 가족과 마을 중심의 사회를 이룸. 가족은 혈통을 중심으로 친족을 이루고, 가족과 친족은 다시 족보 속에 나타난 대(代)와 수(壽)의 관계를 통해 철저한 위계질서로 구성됨.

 

○ 그리고 가족과 친족은 제사를 중심으로 수십 대가 거대한 친족공동체를 형성함. 가족과 친족은 또다시 공전과 공토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마을은 각각의 특징을 감안해서 만들어진 향약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임.

 

○ 1975년의 남북통일과 80년대 초의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과거와 같이 인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유형의 인위와의 투쟁요인이 더 이상 상존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의 빵과 행복을 추구하기에 급급한 시장경제체제로 전향한 베트남은 약화되고 있는 자신들의 공동체 문제를 놓고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음. 

 

우선 베트남 사회는 모계사회이며 인구(약1억)의 65% 이상은 30대 미만의 젊은 계층이다. 그  65%에 해당하는 젊은 계층의 60% 이상은 20대의 여성이다. 이들에겐 신체적 정신적으로 좀 특이한 특징이 있다.

 
1) 베트남의 여성에게는 살찐 여성이 없다 거이 대부분이 허리가 25인치 이하이다. 그리고 흑인 특유의 구조와 같이 힙이 올라와 있다. 이들에게 청바지 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은 상상하고도 넘친다고 봐야 한다. 특히나 그드의 아오자이는 허리의 힙라인이 살짝 살짝 비추고 속옷은 거의 투명한 실크와 같아서 이를 보는 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을 불러 온다.
 
2) 베트남여성들의 신체 기관은 매우 적다 그리고 그 탄력성 또한 대단하다. 이런 신체적인 특성은 외국인들로 하여금 베트남인을 사랑하고 미쳐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 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약 2~3%에 해당하는 신체적 특징이 베트남인에게는 대부분인 것이다.
 
3) 베트남 여성은 비록 가라오케에서 일하지만 그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리고 일하면서 만난 남자라 할지라도 그 관계가 지속되길 원한다. 우리 나라와 같이 잠깐 있다 그냥 가바리는 경우는 거이 없다. 즉 아침이 되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한뒤 헤어지는 것이고, 대부분 전화번호를 공유하여 그날 저녁에는 술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다시 만날 수도 있다 (물론 진생은 예외지만). 그리고 3번을 만나면 그땐 서방으로 대우하고 본인은 마누라의 의식을 갖는다. 이때는 절대 남자를 공유하지 않는다 질투심이 대단하다. 베트남에서는 비밀이 없다 우리나라의 5호담당제를 생각해보면 알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절대 혼자 차지한다. 특히 한국인인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인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모두 서울에 살고 모두 다 잘 사는 줄 안다
 
4) 베트남의 진풍경은 저녁이 되면 공원 근방에는 어김없이 오타바위가 일렬 횡대로 약 1M 간격으로 쭉~~~줄을 선다 그리고 그위에는 꽁까이(여자) 꽁짜이(남자)가 포옹 자세로 있다. 이들에게 오토바이는 우리나라의 자동차다. 즉 그들은 오토바위 위에서 사랑을 태우는 것이다. 이름하여 오토바이 "쎄"자를 써서 쎄까이 쎄짜이라고 한다. 그 작은 오토바위 위에서 온갓 자세가 다 나온다 상상을 초월한다. 즉 우리나라 카섹스에 해당하는 모든 자세가 그위에서 이루어 진다. 그 진풍경을 한번 생각해 봐라. 이제 베트남에의 호기심은 시작임을 명심하고 흥분은 아직 이르다고 할 수 있다.

 

 

 

 

 

 

 

 

 

 

25. 베트남인과 한국 사람 문화와 민족성 의한 성격 차이점

 

현재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점점 더 가깝게 되는 이유는 한국과 베트남이 같은 아시아 사람들이고 문화, 역사, 사회의 분야에서 보면 같은 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나라가 지금까지 경제적인 관계를 맺고 한국인들이 베트남에 가서 공장을 세우고 베트남 근로자들이 한국에 와서 일하고 많은 베트남 여자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 이런 교류들이 생겼지만 관계를 맺게 되면서 여러 문제들도 생기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인 성격과 베트남인 성격의 차이점 때문이다. 서로의 차이점을 잘 알아야 문제들이 생기지 않은데 대부분 사람들이 문제에 대해 미리 파악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당황스러워하면서 문제해결방법을 찾게 되고 결국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 문제들이 생기는 것을 막고 해결하고 싶다면 두 민족의 성격의 차이점을 찰 알아야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필자의 관점에서 베트남인과 한국인의 성격의 차이점을 기술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 사람은 순종을 요구하는데 베트남 사람은 설명을 원한다. 대부분 한국사람은 베트남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인도해주는 사람의 말을 따라 하지 않으며 남편이나 시어머니를 순종하지 않아 불만을 갖게 된다. 한국사람에게는 순종이 아주 중요해서 순종해야 같이 일 할 수 있고, 같이 살 수 있고, 좋은 면을 보여 준다. 베트남 사람은 한국사람이 설명 없이 명령만 하고 명령할 때도 화나는 목소리로 하는 것이 불만이다. 베트남 사람은 자존심이 아주 강한 편이다. 그래서 자존심을 존중해주면 모든 것들을 잘 따라 준다. 명령하기 전에 설명을 하고 화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요구하면 잘 따라 주는 것이다.

 

 

한국에 온지 5년 된 베트남 이주노동자 전티투언씨가 이런 일을 겪었다. 전티투언씨는 3년 전에 구미시 황상동 한 공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1년 동안 그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같이 일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하는데 어느 날에 회사의 사장과 문제가 생겨서 회사를 떠났다. 그 때는 설날 첫째 날이었다. 쉬는 날이니까 그날 하루 전에 동생이 대구에서 전티투언씨를 만나러 왔다.

 

기숙사에서 같이 잠을 자고 다음날에 같이 놀러 가기로 했는데 그 날 아침 8시에 회사의 사장이 전티투언씨를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 오늘도 일해야 해”라고 했다. 전티투언씨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사장에게 “오늘 쉬는 날이고 동생도 왔기 때문에 내일 일 하면 안되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이 큰 소리로 “안돼, 빨리 준비하고 일해야 돼, 한국에 놀러 왔어?”라면서 계속 화내면서 상스러운 욕까지 했다. 전티투언씨는 동생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하자,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좋게 부탁해야할 당사자인 사장이 욕을 쏟아 붓자, 그 날 일을 하지 않고 이튿날 그 회사를 떠났다.

 

 

둘째, 한국 사람은 시간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베트남 사람은 아직 시간을 지키는 것이 습관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베트남이 아직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베트남보다 발전하고 회사생활이 사람의 인격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시간을 잘 지키는 습관을 갖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농경생활에게 아직까지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시간개념이 없어서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이 배경들을 잘 이해하고 한국인들이 참을성을 갖고 베트남인들이 좋은 방향으로 시간을 잘 지키는 습관을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셋째, 한국인은 쉽게 화내지만 빨리 잊어버린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은 화내지 않지만 상대방의 욕하는 말을 빨리 잊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다. 문제가 생길 때 대부분 한국인들은 화내면서 큰소리로 욕하지만 그때만 화내고 나중에 자기가 욕했던 말을 다 잊어버린다. 상대방이 잘 못했으니까 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상대방에 대한 불만을 쉽게 잊는다. 그러나 베트남사람은 다르다. 문제가 생길 때 대화를 원하고 화내도 한국사람처럼 큰소리로 욕하지 않는다. 또 자기가 상처를 받으면 대화로 꼭 풀어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면 마음속에 그 상처가 오래 남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혹시 그 상처가 치료되지 못하고 점점 조금씩 커지게 되면 그 때 관계가 깨질 수 있다.


베트남 이주여성 투항씨의 경우가 좀 안타깝다. 결혼하러 한국에 왔는데 남편과 시어머니랑 이천지방에서 생활한지 3개월만에 가출했다. 한국 말을 잘 몰라서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못해서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핀잔을 많이 들었다. 남편은 부부관계에 만족하지 못 할 때 투항씨를 폭행하고 폭언도 많이 했다. 투항씨의 남편이 “내가 와이프를 많이 사랑하는데 왜 와이프가 내 마음을 모르는지 화가 나”라고 했다. 그러나 투항씨는 “무슨 사랑이 그래요? 욕하고 때리고 명령만 하는 남자랑 같이 사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라고 했다. 결국, 투항씨는 가출했고 불법신분이 되었다. 그들의 가정은 불행한 끝을 맺었고 각자의 마음에 큰 상처만 남았다.

 

우리가 이런 차이점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서로 좋은 점을 배우고 안 좋은 점을 없애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가도 잘 살 수 있고 어디에 가도 일을 잘 할 수 있다. 같은 점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협력하고 관계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 공동체가 더 완벽하게 되고 우리 관계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대구외국인근로자선교센터 소장 박순종 목사는 한국사람과 베트남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문화와 베트남문화가 모두 다 아름답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이제 공장에서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서로 이해하고 잘 협력해서 같이 일하고.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는 한국 남성들이 행복하게 될 가능성 유무는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26.베트남 상인들의 특성 

 

베트남의 상인들은 상거래 행위에 있어서 조금은 독특한 관행을 가지고 있다일반적으로 단골이 되면 서비스도 더 잘 해 주고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면 얼마간의 할인을 해 주는 것이 일반적인 상거래이다하지만 베트남의 상인들 특히소매 상인들은 단골에게 오히려 더 비싸게 값을 요구하며 대량으로 구매를 하면 오히려 물건 값을 더 요구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단골 손님은 내가 파는 물건이 마음에 들어서 자꾸 오는 것이니까 마음에 드는 만큼 더 비싸게 받는다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소규모 상인들은 많은 양의 재고를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량의 주문을 받을 경우 다른 곳이나 도매상에서 긴급히 물건을 구매하여야 하기 때문에 더 비싸게 받아야 한다는 논리 이다.  물론 현재 베트남도 시장 경제 논리에 따라 점차 바뀌어 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관행이 완전히 바뀌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현지에서 이러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잘 이해하고 대처하여야 한다.

 

 

 

 

 

 

 

 

 

 

27.베트남인의 이웃

 

베트남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매우 중요하다. 이웃과 혈통의 관계에서는 혈통이 상위 개념이지만 거주 지역 내에서는 이웃이 혈통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예컨대 베트남 속담에 ‘멀리 있는 형제를 팔아 가까운 이웃을 산다(Ban anh em xa mua lang gieng gan)’ 라는 말이 있다. 즉 가까운 이웃을 사기 위해 형제를 판다는 것이다. 만약 형제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과의 관계를 형제관계보다 더 위에 놓아야 한다. 이런 전통 때문에 도시의 아파트 같은 곳에서도 베트남 사람들은 이웃과 쉽게 친해진다. 그리고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도 아주 쉽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베트남인들에게는 어디를 가든 이웃이 중요하다.
 
베트남인의 공동체의 개념을 나열해 보자면, 첫 번째는 물론 혈연(家族과 宗族)공동체로서 부부와 자녀, 부모, 조부모와 친인척이다. 두 번째는 거주공동체로써 이웃(hang xom)과의 관계를 말하며 여기에 취미 등 친목모임 등이 발달되어있다. 세 번째는 생산 공동체로써 농부는 농부끼리, 상인은 상인끼리 수공업자는 수공업자끼리 그리고 직종의 구체적인 유형끼리 강한 결속력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보다 큰 생활공동체인 촌락(village,마을)이 있다. 전통적으로 베트남의 촌락은 정치외교/경제/종교/문화/국방이 촌락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는 마을이 높고 견고한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대나무성이라고 불렀다. 즉 이 대나무성이 작은 국가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인은 매우 높은 국부성(局部性)을 갖는다. 이 때문에 도시에 나와서는 동향인(同鄕人)이, 외국에 나와서는 동포(同胞)가 자신의 중요한 이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만나 교제하며 결속을 다진다. 이런 모습이 한국인의 눈에는 혹시 무엇을 도모를 하는 것처럼 비칠 때도 있다.
 
한국에 한베다문화가족의 수가 매우 많다. 만약 한국의 시댁 식구들이 베트남 아내의 외출과 사회활동을 막는다면 베트남 아내들을 굉장히 힘들게 만들 것이다. 한 번은 하노이 근교에 위치한 어느 촌락에 실패한 한베다문화가정들을 탐방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어떤 베트남 여성은 자신이 한국에 시집가서 살았던 곳이 지리산 골짜기였다고 말하면서 언어도 통하지 않고 특히 남편과 소통이 되지 않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견디다 못해 베트남으로 돌아오고 말았다고 한다.

베트남여성은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교제가 없으면 고통스러워 한다. 더 나아가서 베트남여성들은 생산 공동체와도 교류를 해야 한다. 베트남 여성들은 집안에만 있는 것을 좀이 쑤시는 것처럼 힘들어한다. 나가서 수다를 떨고 또 직업을 갖고 일을 해야 힘을 얻는 여성들이다. 대부분의 베트남 남편들은 이것들을 수용한다.

이처럼 베트남은 혈연공동체를 넘어서서 강한 결속력을 가진 이웃 공동체로서의 거주공동체, 생산 공동체, 생활공동체가 한국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이웃과의 활발한 교류와 강한 결속 속에서 자란 베트남 여성이 한국의 제한적이고 폐쇄된 다문화가정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또한 베트남의 여러 기업들과 투자 상담을 해보면 베트남 기업인들 상당수가 첫 번째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시장에서의 독점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제품의 특성가격경쟁력 등을 분석하기 보다는 일단 독점 에이전트를 받아 놓고 보자는 식이다이런 경우에는 베트남 예상 파트너의 판매 능력자금 능력 등을 충분히 밝힐 것을 요구하는 등 전후 사정을 잘 고려하여 때에 따라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한다.

다만 관공서의 고위직이나 부유층일지라도 옷차림이나 외모는 수수하다 못해 초라한 경우도 많으므로 절대로 외모로 보고 이들을 판단해서는 안되고 진지하게 대화하고 상대방의 능력을 면밀히 파악하는 노력과 자세가 필요하다.

 

 

 

 

 

 

 

 

 

 

 

 

28. 베트남인의 내면성 문화


베트남에서는 개인보다는 가족이 사회의기본단위가되어있고 개인의 관계에서의 조화는 이기주의와 동일시 되는.개인의업적과 경쟁의식보다 훨씬 가치가있는것으로 여겨진다.

 

지성. 학식 그리고 드넓게 지혜는 신체적인 용맹이나 그것을 위한 용기보다도 훨씬 넓게 평가된다.

 

외세에 의한 오랜 기간의 지배 경험은 베트남인들에게 외국인에 대해 경계심을 갖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우정과 서로 이해를 위한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경계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성급하게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감추려고 하는데 세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람들은 급하고 빨리 빨리 민족의 티를 버리지 못한다.

 

 

 

 

 

 

 

 

 

 

29. 서양인이본 베트남여성

 

베트남인 여성은 서양 여성보다 매력적이다. 그녀들은 활발하며 경쾌하게 움직여, 멀리에서도 저 사람은 베트남 여성이다라고 금방 알아 볼 수 있다.베트남의 여성은 대부분 몸집이 작고, 작은 손동작이나 발걸음도 천천히 걸으며 경쾌한 동작을 하기에 딱 맞다.

 

서양인은 전체적으로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인생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무엇을 해도, 일단 목적이 정해지면, 그들은 모든 일을 그 목적에 올인 한다. 하지만 베트남인은 다르다.베트남인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매우 신중하고, 강한 인내심으로 임한다. 베트남인은 내밀한 마음을 가져 겸허하고, 과신하는 것은 없다.

 

시간에 대한 개념과 감각도 다르다.서양인은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의 물질과 같이 확실성이 있는 실체라고 인식해 충분히 절약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들은 모든 방법으로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한편, 내가 만난 대다수의 베트남인은 통상, 시간이라는 것을 무엇인가 무한한 것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내세(?世) 그리고 그 내세의 시간까지 생각하고 있어 시간에 끝이 없다. 시간을 물질이며,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는 서양인은 시간에 쫓기는 것에 익숙해져(그리고 아마도 거기에 행복을 느끼고), 언제나 바쁘다.

 

하지만 베트남인은 통큰 자세로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고, 금년이 아니어도 내년이 있단 말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의 여성은 달리는 방법도 다르다.서둘러 이동할 경우, 그녀들은 머리를 조금 내려 짧은 보폭으로 손은 몸에 끌어 들인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에서 서둘러 이동할 때나,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 몸체를 작게 하고, 수세를 취하는 것과 같다그리고 이 자세는 역학적으로도 효과적 이다.

 

서양의 여성들은 서둘러 이동할 경우에는 마라토너와 같이 보폭을 크게 하고, 팔을 크게 젖는다. 그리고 신체는 한층 커져 보인다. 동물의 세계에서 위협할 때에 날개를 펼치거나 하듯이...

 

자신이 무엇인가 도달해야 하는 것이나,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을 앞에 두었을 때에 갖추어야 할 몸 가짐으로써 서양인들이 배우는 품격이다. 그들은 그 목적을 강하게 희망하고, 그리고 거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접근 한다. 경쾌한 언행이나 인내심, 겸허함이라는 것은 미덕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의 행동에만 국한 된다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트남의 남성은 대부분 서양의 남성들과 같이 당당함이 부족하다. 베트남의 남성은 언제나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굽히고, 시선을 땅 아래쪽으로 떨어뜨려 걷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남성들은 선천적으로 자신감을 타고나지 않았다 해도, 언제나 어깨를 펴고, 배도 앞으로 쑥 내밀고, 가슴을 펴, 자신의 힘이나 남자다움을 나타내려고 하고, 이렇게 하여 모든 상황에 있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다.

 

앉을 때도 마찬가지로 서양의 남성은 당당하게 다리는 벌리든다지,꼬고 있다.이것은 베트남의 남성에게서는 별로 볼 수 없는 자세이다. 베트남인의 남성은 얌전하고 겸허히 앉는다. 옛날의 철학자와 같이...

 

그들이 서양사람과 같이 눈에 띠게 과시 하거나 힘을 나타내 보이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서양인에게 있어서는 남성들의 지나친 겸손은 자신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추어진다.

 

 

 

 

 

 

 

 

 

 

 

 

Paul Mauriat Best 모음곡

    01. Minuetto
    02. Air on The G String
    03. Concerto D Aranjuez
    04. Ballade Pour Adeline
    05. Hungarian Dance No.5
    06. Penelope
    07. Besame Mucho
    08. Bilitis 77
    09. Polonaise(Los Chacos)
    10. Dark Eyes
    11. Recuerdos De La Alhambra
    12. Ebb Tide
    13. El Condor Pasa
    14. Red River Velley
    15. Free As The Wind
    16. Maggie
    17. Il Silinzio
    18. Yesterday



 

 

출처 : 아내는 월남댁
글쓴이 : 차태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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