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사나이 홀릭은 두어자 글로써 라켓에게 고(告)하노니,
사나이의 연장 가운데 중요한 것이 라켓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통 테니스에 관심이 없는 바이로다
이 라켓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라, 미안하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지 우금 십이일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미안하다. 눈물을 짐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사죄 하노라.
친구에게 소주두잔 사주고 뺏은 라켓으로 테니스 배운지 어언 두달째
밥먹을때도 잠잘때도 똥쌀때도 라켓생각만 간절하더라
하여 동대문 조테니스에 갔더니 사장님 보자마자
그냥 이것쓰세요 하고 권했던 그 라켓
저 테니스 친지 두달밖에 안됐는데요 했더니
손님은 그냥 이것가지고 치시면 됩니다 하면서 권했던 그 라켓
저 여기오면 테니스 라켓 상담도 해준다고 해서 왔는데요 했더니
제가 이장사 30년 됐거든요 제가 보니까 손님은 이 라켓으로 치시면 됩니다
하면서 권했던 그라켓
테니스 양말 2켤레, 그립 6개, 엘보단추 2개, 시합구 2캔, 스트링 2개 서비스로
받으면서 수동 57로 감았던 그 라켓
너와 인연이 되어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 되었더니,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애석하도다.
나의 성정이 활달하여 술과 담배에 찌들어 복부비만이란 명예로운 타이틀을 획득하였으나
테니스에 마음을 붙여, 널로 하여 건강에 도움이 적지 아니하더니,
오늘날 너에게 사죄하오니 오호 통재라,
이는 귀신이 시기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미안하다 라켓이여,
어여쁘다 라켓이여, 너는 미묘한 품질과 특별한 재치를 가졌으니,
물중의 명물이요, 라켓중에 장땡이라
민첩하고 날래기는 백대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추호 같은 프레임은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그립은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되지도 않은 개폼으로 탑스핀 감을제, 그 민첩하고 신기함은 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이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라,
마누라가 귀하나 바락바락 대들고 밥도 안차려 줄때도 있나니
너의 미묘한 재질이 나의 전후에 수응함을 생각하면, 어찌 마누라에게 비할소냐
오렌지색 그립으로 테를둘러 가방속에 고이모셔
오른쪽 어깨위에 둘러매니 이는 바로 사나이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널로 더불어 벗이 되어, 동네 놀이터서 개폼잡고 휘두르며
해가지면 방구석서 휘둘러서 애꿋는 형광등만 작살내니
너와나의 조화가 무궁하다
이생에 백년 동거약속 하였더니 오호 애재라, 라켓이여.
비가 올듯 말듯 흐린 날씨 속에, 되지 않는 똥폼으로 서브 연습하다보니
나의 분에 못이겨서, 너를 내동댕이 치고 정신차려보니
아야 아야 라켓이여, 저쪽 구석에 쳐박혔구나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하여,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 혼절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쓰다듬어 본들 속절 없고 하릴 없다.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미안하다 라켓이여,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한 너를 저 멀리 집어던지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하며 누를 원하리요.
능란한 성품과 공교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한 의형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는 심회가 삭막하다.
네 비록 물건이나 무심ㅎ지 아니하면, 내 다시는 너를 집어 던지니 않으려니
백년 고락과 일시 생사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라켓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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