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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修之吉, 小人索之凶,
故曰立天地道曰陰與陽, 立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又曰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大哉易也 斯其至矣.
군자는 도리를 연마하니 길하고, 소인배는 도리를 거스르니 불행해진다.
그래서 이르기를
하늘의 도를 세우는 것은 음이 양을 따르는 데 있고,
땅의 도를 세우는 것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따르는 데 있으며,
인간의 도를 세우는 것은 仁으로서 義를 따르는 데 있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原始反終)하였으니,
이로써 삶과 죽음에 대한 이론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하다 역(易)의 이치여. 지극하도다.
이 도설에서 구분하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단순하다.
군자는 도리를 수행하는(修) 사람이고, 소인은 이익을 좇는(索) 사람이다.
대개 사람의 행동은 옳음과 그름, 이익과 손해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是非를 선택의 우선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있고,
利害를 우선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
시비를 가리면서도 되도록이면 이익을 좇으려는 건 성인군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시비와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에, 시비를 우선하는 사람이 군자고, 시비를 벗어나더라도 이익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이 소인배라는 것이다. 주돈이의 구분법이 실로 단순명쾌하다.
[시비와 이해]라는 두 가지 선택 기준과 관련하여..
조선 후기 丁茶山이 유배 중 아들 연아(淵兒)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떠오른다. (익히 아시겠지만)
그때 아들은 아버지를 解禁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었다. 마침내 권력 실세와 끈이 닿아 부탁할 길을 찾았다면서 아버지에게 모모씨에게 사면을 부탁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보냈다.
다산이 즉시 아들에게 써보낸 답장이다.
- 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大衡)이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저울(是非之衡)과 이익과 손해를 가리는 저울(利害之衡也)이다.
이 두 가지 저울에 달면 크게 네 등급의 경우가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 얻는 것이 최상이고,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 다음이다.
나쁜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그 다음이라 할 수 있으며, 나쁜 방법으로 손해까지 본다면 최악이다.
너는 지금 나로 하여금 필천(筆泉)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복을 빌라하고, 또 강가와 이가에게 애걸하라고 하는구나. 이는 네 등급 가운데 세 번째 등급을 구하자는 것이겠으나, 결과는 필경 네 번째 등급밖에 안될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
天下有兩大衡. 一是非之衡 一利害之衡也. 於此兩大衡 生出四大級
凡守是而獲利者太上也, 其次守是而取害也, 其次趨非而獲利也, 最下者趨非而取害也.
今使我移書乞隆 於筆泉 又搖尾乞憐於姜李. 是欲求第三級 而畢竟落下於第四級 吾何以爲之哉.
(다산시문집 제21권 書)
옛 사람이 제시한 기준으로 보면 다산은 이해의 저울보다는 시비의 저울을 택한 셈이다. 그야말로 군자의 길을 택했다고 하겠다.
우리가 감히 소인의 길을 버리고 군자의 길을 택하리라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군자의 길과 소인배의 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두기라도 한다면, 장차 善하고 미쁘고 아름다운 인간이 될 가능성은 최소한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도가 바람직한 것을 알고 따르고 싶어하는] 것만으로도 善人이라(可欲之謂善) 했으니 말이다.
다시 어제의 말을 빌려온다면, 군자는 적어도 성인의 바로 아랫단계, [도가 내면에 가득차서 겉으로 광휘가 드러나는 큰 사람(充實而有光輝之謂大)] 정도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졸렬한 시대
옛 스승들의 기준법으로 지금 시대를 비쳐본다면, 우리의 [암담한 기분]에 그만한 논리적 근거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비와 이해의 두 저울 앞에서 지극히 자주 망설이게 되는데, 지금은 시비의 저울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시세를 모르는 청맹과니가 되고 이해의 저울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시대의 주류가 되고 있다. 군자나 군주 자리까지도 利害의 저울을 대중에게 드러내놓고 이익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이 시대가 그런 인물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태극도의 기준으로 보면 군자의 가치는 퇴색하고 소인배의 가치기준이 지배하는 것이다. 어찌 시대 자체가 졸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체가 의미없는 일처럼 여겨지고, 오로지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최상의 가치로 떠올랐다.
옳고 그름을 論하는 사람을 용케 발견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상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해관계와 보편타당한 시비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기에게 이익까지 따르는 일은 옳게 보이기 쉽고, 손해가 따르는 일은 그르게 보이기 쉽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그러므로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삶을 위한 학문에서, 삶과 함께 종말을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음과 양이 영구히 반복되는 것이라면(靜極復動)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죽은 것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는 것일게다.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는 존재는 몸으로 부활하는가, 영으로 윤회하는가.
몸은 사람이 살아있는 한 주기, 일생에서만 보아도 부단히 변하여 새롭다.
어려서의 몸과 성장해서의 몸, 또 늙어서의 몸이 다르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주 크게 변하는 것이지만, 몸의 형질이 변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이치다. 몸은 변하며 점차적으로 옛 몸이 사라지고 새 몸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에 나온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성학십도>에는 마음, 정신, 영혼이란 주제를 따로 다룬 몇 개의 그림이 있다.
제6 심통성정도(정복심), 제7 인설도(朱子), 제8 심학도(진덕수, 정복심)가 그것이다.
평생 성리학을 공부했던 퇴계 선생은 만년에 정복심의 글을 심취해서 보았다고 한다. 퇴계는 <성학십도> 가운데 몇개의 그림을 손수 그려 보완했는데, 특히 심통성정도에 정복심의 그림 하나를 놓고 자기 손으로 두개의 그림을 추가로 그려 넣었다. 心學에 관련된 그림을 10도 가운데 세 편이나 포함시켰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퇴계는 평생의 공부를 통해 마음과 정신, 영혼에 관해 반드시 연구할 바가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평생 많은 저술을 남겼던 孔子가 만년에 <周易>(가장 추상적 이론인)을 심취해서 보고(위편삼절 되었던 그 책), 이제 이해가 되었다고 피력한 것과 비할만한 일이다.
實物을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추상적인 소재들을 다루는 연구는 학문으로 대접받기도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으나, 역대의 대학자들이 마음이나 易理 같은 것을 심취해 공부했다는 점에는 아무래도 가볍게 웃어넘기기 어려운 시사가 있을 것 같다. 마음과 정신의 문제는 6-8도에서 다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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