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 초연이 아닌 경우라면 피아노 독주회나 독창회에서 악보를 들고 무대로 나오는 연주자는 없다. 프로 연주자라면 암보(暗譜)로 연주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음악대학 입학 실기시험이나 졸업 연주 때도 악보를 보지 않는 게 원칙이다. 악보를 외우는 능력은 직업 피아니스트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은 격식을 갖추지 않은 매우 건방진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대부분의 연주가 금방 작곡을 끝내고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피아노 교수들은 제자들에게 악보를 외우도록 권했다. 젊은 연주자들은 쉽게 악보를 외우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외우기가 힘들어진다. 피아니스트 찰스 로젠은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다음 음이 저절로 생각날 것이라는 확신, 즉 자신감이 없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클라라 슈만(1819~1896)은 1837년 18세때 음악사상 처음으로 악보 없이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다.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열정’소나타를 악보 없이 외워서 연주했다. 클라라 슈만은 “외워서 연주하면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안드라스 쉬프 |
최초의 암보 연주자는 클라라 슈만
하지만 많은 연주자들은 암보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악보를 보고 연주할 때보다 연주가 부자연스러운 경우도 있다. 암보의 부담이 가장 큰 것은 독주자다. 피아노 3중주,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듀오 등 실내악을 연주할 때는 피아니스트도 악보를 보고 연주한다. 실내악단이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했던 1930년대의 콜리슈 4중주단이나 요즘의 제트마이어 4중주단, 자크 티보 현악3중주단은 매우 특이한 예외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경우는 없다. 설사 악보를 깡그리 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피아노 독주처럼 음악이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한참 쉬었다가 나오는 부분이 많아서 악보를 보며 마디수를 세지 않으면 실수하기 쉽다. 실내악이나 교향악에서 악보를 보고 연주한다고 해서 완벽한 연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악보 없이 무대에 서기로 유명한 지휘자는 한스 폰 뷜로(1830~1894)다. 그는 첫 미국 순회공연에서 139회의 공연 도중 단 한번도 악보를 보지 않았다. 1865년 뮌헨에서 바그너의 오페라‘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연할 때도 악보를 치워버렸다. 그가 후배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들려준 충고는 매우 유명하다.“악보에 머리를 쳐박지 말고 머리에 악보를 넣어라.”한스 폰 뷜로가 악보 없이 지휘대에 섰을 때만 해도 평론가들은 상당히 거부감을 드러냈다. 음악성보다 기억력을 자랑하려는 쇼맨십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것에 대해 단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음악 행위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 이후의 일이다.
오페라 가수들도 악보를 다 외워서 연주한다. 하지만 오페라 무대에도 프롬프터가 있다. 객석에는 들리지 않게 다음 가사 구절을 불러준다. 노래를 부를 때는 가사를 외워야 하지만 가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이기 때문에 암기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 물론 음악도 하나의 언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명쾌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악보를 외우는 것이 말을 외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지휘자들도 때로는 악보 없이 지휘대에 선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암보로 인한 수많은 실수는 객석에서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작곡가들이 처음부터 연주자에게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다. 베토벤의 제자 칼 체르니는 엄청난 암보력을 자랑했다. 스승 베토벤의 작품을 모두 외워서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베토벤은 암보 연주를 거부했다. 악보 위에 적혀 있는 악상기호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을만큼 건성으로 연주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쇼팽은 제자 중 한 명이 자신이 쓴 녹턴을 외워서 들려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냈다.
멘델스존도 뛰어난 암보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암보 연주를 드러내놓고 자랑하진 않았다. 그가 런던을 방문해 피아노 3중주를 연주할 때였다.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았는데 피아노 악보만 없는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무 악보나 올려 놓고 넘돌이를 시켜 악보를 넘기게 하면 내가 외워서 연주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겠죠.”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는 1841~42년 10주 동안 베를린에서 21회의 독주회를 열었다. 무대 위에 오른 다음 양손에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어 객석에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는 이번에는 악보마저 객석으로 던져버렸다. 악보 없이 외워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대 매너였다. 프로그램에 오른 작품 80곡 중 50곡은 암보로 연주했다. 당시 그의 연주를 묘사한 그림에서 리스트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지만, 레퍼토리의 절반 가량만 외워서 연주했다. 자작곡을 연주할 때는 가벼운 즉흥연주가 아니라 매우 진지하게 정성과 노력을 기울인 결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보를 펼쳐 놓고 연주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묘기…연주자에겐 고역
암보에 대한 중압감은 클라라 슈만이 활동하던 시대보다 요즘이 더 심하다. 옛날 청중은 가끔씩 틀린 음을 연주하더라도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다. 레코딩 시대가 도래하면서 음반으로 음악을 접하던 청중들은 실제 연주에서도 완벽한 연주를 기대한다. 악보 없이 외워서 연주하는 것은 청중에겐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묘기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줄지 몰라도 연주자에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독주자를 선호하는 경향 때문에 레퍼토리가 점점 좁아진 것도 사실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집에서는 엄청난 레퍼토리를 악보를 보면서 연주했지만, 정작 공개 연주회에서는 불과 몇 안되는 레퍼토리만 고집했다. 오늘날에는 연주자들이 시즌 내에 한정된 레퍼토리만 연주한다. 악보를 외워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다.
악보를 잘 외우는 것은 곧 음악적 능력과 직결된다. 짧은 가요나 동요를 외워 부른다면 모를까 2시간 동안 복잡한 음악을 음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연주해내는 것은 정말 신기하다. 하지만 악보를 외워 연주한다고 해서 음악가들의 기억력이 유별나게 뛰어난 것은 아니다. 프로 기사들이 바둑을 척척 복기(復碁)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포석 다음에 돌이 갈 만한 위치는 불과 서너 개 밖에 없다. 특정한 작곡가나 스타일로 된 음악이라면 쉽게 외울 수 있다. 어차피 음악은 확률 게임이다. 음악가들은 악보를 각각의 음표가 아니라 음계나 화음 진행 등 프레이즈로, 낱개가 아니라 덩어리로 대뇌에 입력한다.
악보 없이 연주하면 음악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일단 어떤 작품을 외우고 나면 더욱 수월하게 테크닉과 연주 효과에 몰두할 수 있다. 피아노만 덩그렇게 놓여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연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악보 없이도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다. 악보 페이지를 넘기는 넘돌이나 넘순이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연주 동안 손가락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고 눈을 감고 연주하면서 음악에 심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훌륭한 음악이 나온다는 법은 없다. 특히 지휘할 때는 세부사항을 꼼꼼히 파악하지 않고 주선율만 외운 다음 대충 박자만 맞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악보 없이 지휘하다 보면 작곡가의 의도에서 벗어나기 쉽고 지휘를 한낱 구경거리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경고도 귀담아 들어둘 만하다.
1999년 미국 밴 클라이번 재단이 제1회 국제아마추어피아니스트 경연대회를 열었을 때 주최측에선 대회 참가자들이 악보를 지참해도 좋다고 밝혔다. 악보를 굳이 외워서 연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곡을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사람과 외워서 연주하는 사람을 평가할 때 과연 누구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겠느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전문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당연히 악보 없이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안젤라 휴이트 |
악보 고집하는 독주자도
악보를 놓고 연주하는 것을 고집하는 독주자도 있다.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벨라 바르톡, 영국 피아니스트 미라 헤스(1890~1965), 프랑스 피아니스트 라울 퓌노(1852~1914)도 악보를 펴놓고 연주했다. 최근에는 피터 제르킨(1947~)도 굳이 악보를 외워서 연주할 필요가 있느냐는 입장이다. 물론 그도 1970년대초 연주시간이 무려 2시간 넘게 걸리는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을 송두리채 외워서 연주한 적도 있다. 스토니 브룩 뉴욕주립대 교수이기도 한 피아니스트 길버트 칼리시(1935~)도 독주곡에서 실내악곡까지 모든 레퍼토리를 악보를 펴놓고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자들에게도 악보를 보면서 연주해도 된다고 했다. 연주하는 동안 객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든지 휴대폰 수신음이 들린다든지 조금이라도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일이 발생하면 다음에 연주할 음표를 까맣게 잊어버려 연주를 망칠 수도 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테르는 1970년대말부터 암보 연주를 포기했다. 청력과 음감이 떨어져 가끔씩 조를 옮겨 연주하는 경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악보 암기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매번 비슷한 레퍼토리를 연주하기보다 악보를 보면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하는 게 낫다고 충고한다. 악보를 무조건 다 외우려는 것은 건강해 해로울 뿐만 아니라 허영심의 발로라는 것이다.연주자들이 악보 외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한 작품을 외우느라 소비하는 시간에 다른 작품 여러 곡을 마스터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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