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史蹟)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文廟와 成均館)
지정일 : 1964 . 11. 10. 소재지 : 서울 종로구 명륜3가 53
시 대 : 조선 시대 관리자 : 서울 종로구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 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존경각과 향관청, 비천당, 계성사가 있으며, 남쪽 좌우에 유생들이 살면서 글을 읽던 동재와 서재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배치되 있다. 동재 동편에는 식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창고, 육일각, 잡사가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는 유교의 중심지로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
태조 창건의 문묘는 건립된지 얼마 되지 않은 정종(定宗) 2년(1402)에 화재로 소실되어 태종(太宗) 7년(1407)에 중건되었다.
문묘에는 주건물인 대성전에 공자(孔子)를 비롯한 4성(聖) 10철(哲)과 송조(宋朝)의 6현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동, 서 양무에는 공자의 70제자와 한국과 중국의 대유(大儒) 111위의 위패를 모셨고 전국 각처에 있는 문묘의 중심이며 최대규모의 것이었다.
이렇듯 문묘는 한양 천도 직후 궁궐과 종묘 사직단 다음으로 건립되고 연산군대를 제외한 모든 왕조에서 이를 중요시한 것은 조선왕조의 정교(政敎)의 근본을 유교에 두었기 때문이다. 문묘는 원래 남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중문과 동·서무 그리고 중심부 뒷쪽에 본전인 대성전이 있다.
서울 문묘 전각 배치도
외부 및 내부에서 본 신삼문. 외삼문과 내삼문을 모두 일컬어 신삼문이라 한다. 신삼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중앙은 신이 드나드는 신문(神三門)이고 양쪽의 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인문(人門)이 였다.
신문은 항상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게 하고, 일반 제관은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오도록 출입이 명시되어 있다.
서울 문묘에서 동문은 동삼문이 있다. 서울 문묘에는 은행나무 네 그루가 자라고 있다. 신삼문 좌우측에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를 보고, 신삼문과 서무 사이의 외곽 코너에서 전경을 보았다.
신삼문 좌우측에 서 있는 은행나무. 내부에서 좌측, 우측 은행나무를 보았다.
대성전 정면 및 전각 내부에서 본 대성전 및 신삼문 전경.
석전대제(釋奠大祭)란 공자를 모신 사당(祠堂)인 문묘(文廟)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말한다. 석전이란 채(菜)를 놓고(釋) 폐(幣)를 올린다(奠)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원래는 산천, 묘사(廟祀), 선성(先聖: 공자. 739년에 문선왕으로 추존됨) 등 여러 제향에서 이 석전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으나 다른 제사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문묘의 석전만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은 문묘제향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묘정비 전면 및 이수. 후면. 귀부 앞과 측면. 묘정비의 비문은 1409년(태종 9) 변계량이 글을 지어 묘정에 건립하였고, 비각은 1511년(중종 6)에 세웠으나, 7년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1598년)으로 불 타버렸다. 비문은 다시 변계량의 옛 글에 의해 각석하였고, 비석 후면에는 이정구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여 이홍주가 쓰고 비신 윗부분에 있는 전서체는 김상용이 썼다.
명륜당[明倫堂] / 보물 제141호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을 두었는데, 강당은 정면 3간(間) 측면 3간(間)이고, 좌우 협실은 각각 정면 3간반(間半) 측면 2간(間)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으로 결구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 양측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 두 협실은 명륜당 벽으로부터 정면 2간반(間半)과 측면 2간(間)은 대청이고, 나머지 정면 1간(間) 측면 2간(間)은 온돌방이다. 이들 두 협실은 장대석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초익공으로 결구하였다. 지붕은 겹처마로 명륜당 쪽은 맞배지붕이나 두 끝단에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나주향교·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온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뒤 벽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200명을 한도로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한편, 명륜당 뜰에는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된 유교의 상징목(象徵木)인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 59 호)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6m, 가슴높이 둘레 12.09m에 이르는 웅장한 나무로 가지 발달이 왕성하고, 유주(乳柱)가 잘 발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문묘(文廟)의 명륜당(明倫堂) 경내에 서 있는데, 임진왜란(1592) 당시 불에 타 없어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1602)에 함께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한편,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하는데, 아침·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
유생들의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재뢰(財賂)·주색(酒色) 등을 말하는 것과, 바둑이나 장기 두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을 받았다.
상재생(上齋生 :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은 하재를 방문하지 못하며, 하재생(下齋生 : 사학생도(四學生徒)와 같이 유학(幼學)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에게 과실이 있으면, 식손(食損 :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과 출재(黜齋 :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하였으며,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통해서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특히, 조정의 부당한 처사나 정책에 대해서는 유소(儒疏)나 권당(捲堂) 등으로 맞섰다. 유소는 왕에게 직접 상소를 올려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고, 이것으로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일종의 동맹 휴학이라고 할 수 있는 권당으로 맞섰다.
한편 유생들의 교과목은 일정한 독서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맹자』는 각 4개월, 『시경』·『서경』·『춘추』는 각 6개월, 『주역』·『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한편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들의 제반 경비는 양현고(養賢庫) 소속 토지 1,000결의 지세(地稅)로 충당하였는데, 지세는 흉년이 들면 반감 또는 전감하는 때가 많았다.
정록청 [正錄廳]
명륜당 동쪽에 남향, 8간(間)으로 이루어진 건물로서, 태조 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되었다. 정록청이란,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의 끝 글자(字)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성균관 관원의 사무실이었다.
정록청 설립 초기에는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기능은 폐지되고 관내의 서무만을 전담하는 기구로 축소되었다.
정록청에서 바라본 명륜당과 존경각 그리고 육일각
존경각과 육일각
존경각[尊經閣]
명륜당 북쪽에 있는 존경각은 성종 6년(1475)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후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어 복원한 뒤로 왜란(倭亂)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改修)하였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서적 위주였으며, 불교·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장서의 분량은 존경각 건립 초기에는 수만 권에 달했으나, 잇단 전란(戰亂)과 재정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다.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으나,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강제로 옮겨지고, 나머지만이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향관청 [享官廳]
문묘 제사 때에 제관(祭官)들이 재계(齋戒)하고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년(1473)에 명륜당 북동쪽에 남향, 10간(間)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후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에 중건되었다.
중앙에는 제사에 쓰이는 향축(香祝)을 보관하고 좌우에는 헌관방(獻官房)이 있다. 한편, 향관청의 좌우에는 감찰(監察) 집사(執事)들이 사용하던 동·서향 6간(間)으로 건조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이 있다.
하마비
성균관대학교 정문 좌측에 하마비와 탕평비가 있다. 비는 볼 수 없다. 주위에 감지기가 있어 비각 문 가까이 갈 수가 없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사람들은 비각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비를 보러 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관광책자에는 비가 위치한 곳을 '~비'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각'으로 표시해 놓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듯 하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문화재 훼손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나 비를 볼 수 있는 다른 방안을 강구했으면 좋겠다. 비는 보지 못했다. 탕평비는 1742년(영조 18년)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에 영조의 어명으로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반수교 위에 세워진 비석이었다. 반수교는 성균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동반수東泮水,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서반수(西泮水)라고 하였는데,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설치한 다리이다.
현재 명륜동1가 16번지라고 하는데, 지도상에서 성균관대학교 정문에서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꺾이는 지점 근처이다. '탕평(蕩平)'은 시경 홍범에서 따 온 말이다. 시경 홍범에는 9조목(九條目)이 있는데,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육극(六極)이다. 이 중 탕평이 들어있는 곳은 '황극(皇極)' 편이다.
이 황극 편에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 무반무측 왕도정직 회기유극 귀기유극..."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치우치지 않고 한쪽으로만 무리 짓지 않으면 왕의 길은 넓게 될 것이며, 한쪽으로만 무리 짓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의 길은 평평하며, 거꾸로 하지 않고 기울어지게 않으면 왕의 길은 바르고 곧으며, 법칙를 지켜 이들만 모으면 법칙을 지키는 이들만이 따르게 된다." 이는 곧 왕이 공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가 평탄하는 것을 의미한다.
탕평비에 새겨져 있는 글은 논어 위정 편을 활용한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논어 위정 편 중에서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자왈 군자 주이불비 소인 비이불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공자께서 말했다. 군자는 골고루 통하되 패를 지어 견주지 않으며, 소인은 패거리를 지어 서로 견주되 두루두루 통하려 하지 않는다." 탕평비에 새겨진 글은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비이불주 과소인지사의"이다. 이 말은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반복되고 있었다. 영조 때 조선은 붕당정치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폐해가 극심했다. 이에 영조는 장차 미래를 이끌고 갈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치의 바른 길을 알려주려는 뜻에서 친필을 내려 탕평비를 세웠다.
비천당
주자의 '큰 도를 밝힌다.'는 말에서 유래한 비천당.현종 5년 지어져 명륜당과 함께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출처] 사적(史蹟) 제143호 서울 문묘와 성균관 (서울 文廟와 成均館)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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