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016. 6. 22: 여행의 의미, 내적표상 그리고 Grounding (작성중)

cool2848 2016. 6. 22. 03:30

{인트로}

며칠 사이 베트남 체류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고 마음이 짓눌려 있다 보니, 나의 경우에 흔히 그러하듯이, 자꾸 해야만할 일보다는 딴 짓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밤과 낮의 싸이클도 점점 더 애매해졌다.

조금 전에도 알지도 먹어 보지도 못한 이상한 베트남 길거리음식들을 먹고는 입맛에 들지않아 라면까지 끓여서는 먹다가 반도 더 남기고는 그 식곤증에 초저녁부터 자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서, 작년에 읽은 미셸 옹프레 저 <철학자의 여행법>에 대한 내 짧막한 블로그 감상문을 다시 씹었다.

(이러니 살이 안찔 수가 있나?!)


{집짓기 여행}

전에 얘기했던 것인데, 내가 급하게 조기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 집 정리와 여행들이었는데 워낙 집짓기가 금전적으로 큰 부분을 점유했기 때문에 적당히 처리하고 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세상 일에는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일"도 있고, "중요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도 있는데, 조기 정년퇴직에 대한 결정은 양쪽 측면을 함께 가진 일이었고 건축은 후자의 측면을 가진 일이었다.

나는 급하지 않던 일을 생각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함으로써 그일에 매이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내가 막상 하고 싶어했던 일들을 못하게 되었다.



결국 자유를 얻어 훌훌 털고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집짓기에 매이게 되었다고 당시 일 때문에 자주 만나던 설계소 강소장님에게 불평을 하였더니, 그는 직각적으로 "집짓기도 여행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흠~

맞는다.

어떻게 보면 세상만사가 다 <이벤트>들(event; 사건: 시간을 기본적 축으로 생기는 변화)이 아니겠는가?

시간의 축 위에서 일어나는 세부 집짓기 사건들.

잘 모르는 함축된 언어로 기술된 설계도는 모르는 세상을 찾아가는 여행 계획표와 비슷했다.

새로운 건축 자재와 새로운 분야의 일꾼들, 그들과의 낯설은 소통행위는 모르는 나라에서 만난 건물들과 사람들 그리고 낯선 언어와 문화같았다.

대부분은 별 문제가 없어도 한두명과는 소통에 문제가 분명히 남아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일상에서 우리의 둥지 (habitat)와 그 주변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굳이 고민할 필요없이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이미 해결책들 (routine)을 알고 있는 문제들이나 습관적으로 행하는 문제이거나 생각할 시간이 없이 본능적으로 대응을 하는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들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생각하며 무언가 절실히 원해서/아니면 원한다고 생각해서 행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새로운 문제들이고 새로운 해결방법들을 모색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우리 인생에 중요한 줄기들이고 각각 작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커다란 나무던 작은 나무던 수십년 내지 심지어는 백년을 가까이 살아가면서 뿌리와 가지를 뻗고 나무잎과 꽃?과 열매을 피우고 맺으면서 그 길다면 긴 세월, 짧다면 짧은 시간을 살아 나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바람직한 것일까?



이번의 집짓기는 어떤 의미와 즐거움을 나에게 주는 것이었을까?

내가 가보고 싶어 했던 여행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집짓기가 나의 인생에 부담이라면 오히려 간단히 팽게쳐야 하는 것 아닐까?

이곳은 나에게 정말 노후의 거처로 좋은 곳이 될 것인가?



언젠가 한번 바닷가를 내려다 보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다는 다소간 낭만적인 생각을 했지만, 그냥 해보고 싶어서 해보기에는 집짓기는 너무 커서 나와 남의 시간과 정력, 금전을 뺐는 사건이다.

그러기에는 나의 생각이 너무 게으르거나 사건의 중요도에 비해 계획이나 처리가 너무 안이했다고 생각된다.

좀 더 다른이들의 노후 전원생활과 집짓기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다시 한번 집짓기를 이 생애에서 하게 될 것인가?

만약 하게된다면, 한번 더 하게 될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어떻게 잘 할 것인가?

집짓기란 이렇게 심각하게 사전에 넓고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무거운 사건이다.



내가 남미에 배낭여행에 가서 제일 많이 물어본 것은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이나 만난 여행자들에게 <왜 여행을 하는가?>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제일 많이 물어 본 질문은 <이번 여행에서 무엇이 제일 좋았느냐?>였다.

 


내가 40일간의 남미배낭여행, 그리고 그전에 반년에서 일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 대양항해를 계획하기 전부터 나는 왜 여행이나 항해를 하는 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보통 사람들이 내기 힘든, 따라서 일상 생활에 많은 희생을 해가면서까지, 시간을 내야하고, 동시에 돈도 적잖게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왜 이리 여행을 좋아하는 지가 궁금했다.

이런 점들이 남미여행같은 경우에는 나에게는 남는 시간과 돈을 평소에 하고 싶어했던 일을 하는 데 쓰는 비교적으로 수월한 조건들이었기에 나는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행을 하기 위한 좀 더 확실한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궁금했다.

왜?



내가 보기에 여행이란 잘 알고 있는 내 둥지와 주변에서 익숙한 루틴들로 이루어진 일상생활을 벗어나 미지의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는 일련의 사건이다.

 

이렇게 여행이란 잘 알고 익숙한 기존생활에서의 벗어나 미지의 세계와의 교접하는 과정에서 알지 못하는 주변 환경과 알지 못하는 언어문화등으로 인해 불편할 수 밖에 없고 동시에 그런 불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지를 완벽히 모르기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안하지 않은 여행은 오히려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미지의 공간에는 주변의 경관과 다른 기대치 못한 처음으로 감각하는 자연 경관과 함께 인공적인 구조물들이 포함될 것이다.

나아가 미지의 관계에는 과거의 인간들에 의한 역사적인 유물과 건축물과 함께 자연현상에 의해생긴 유적들과 함께 현재 존재하는 전에 만나지 못했던 인간들과 동물들그리고 식물 및 무생물체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미지의 공간이란 내 머리 속에 이미 그라운딩된 (grounding: 내적 모형과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당시의 현실의 매칭 과정) 해당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행을 가면 흔히 하는 말처럼 <(개)고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고생을 여행 전과 후의 일상 생활에 커다란 희생까지 해가면서 사서 하는 것일까?

 

좋은 답이 별로 없었다.

어떤이들은 유적이 좋다고 하고, 어떤이들은 자연경관이 마음에 끌린다고 하는 얘기들을 했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그렇게 좋아서 이 모든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별로 공감이 가는 답이 없었다.

나는 내가 확실히 공감할 수 있는 뚜렸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왜 여행?}

그 중 의외의 대답이 있었다.

브에노스아이레스의 호스텔 아침식당에서 만난 혼자 2개월간을 아르헨과 브라질인가 두 나라를 장기 여행하는 아주머니의 얘기 중이었다.

내가 묻는 집 떠나면 고생인데 왜 여행을 자주 하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집을 떠나면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마도 혼자 사는 직장 여성 중에는 집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떠나 여행에서 자기처럼 마음이 편한 사람들이 적지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여행이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들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집과 직장 등으로 이루어진 일상생활에서의 긴장과 스트레스 상태에서 벗어나 여유와 편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묻는 것이다: 집과 한국이 편하냐고?

 

흐음~

생각치 못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한국이 편하고 자유롭게 뭐든지 있는 지상천국 같은 곳인데...

그러니, 그런 상황을 떠나면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고 그래서 이런 불편과 부자유로움을 보상할 뭔가 확실한 댓가가 있어야 (외국)여행을 떠날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쨋던 그런 그들의 상황이라면 그런 소박한(?) 이유만으로도 외국여행을 가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런 것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나도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일상에서의 할일과 생길 일들도 할 수 없다는 안도감에 홀가분햇었던 보다 젊은 시절이 생각이 난다.

확실히 나도 그러 하였다.


{여행, 내적표상과 그라운딩}

적어도 나에게는 여행은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경험함으로써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게 되어 나 머리속의 세계에 대한 내적표상을 확장함으로써 아직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나를 보다  일반적이고 온전하며 따라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해본다.

즉, 주위 세상의 자극에 대응하면서 살아가고 살아내야 하는 적응적 생명체로서 여행은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내 생존수단이 그곳에 있지 아니 하므로 비교적 위험부담을 덜 지면서도 전세계 universal set 중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자료를 공급해줌으로서 그 자료를 기존의 내적표상에 첨가하고 보다 일반적인 내적표상을 만들게 도와 줌으로써 내가 앞으로 보다 미지의 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온전한 complete 세계 모형을 만들 수록 도와주는 순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 모르는 것들은 나의 두뇌에 말 그대로 프레쉬한 (fresh) 자극을 주고, 위험부담이 적은 비경계적인 상태에서는 즐rl길 수 있는 학습의/게임적인 자극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H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굳이 따로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과연 누구나가 절대적으로 여행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은 좋아서 선택하는 행위이리라.

그 이유는 어쩌면 보다 직접적으로는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아주머니처럼 꽉짜인 일상을 떠나는 데서 오는 홀가분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여행을 가서는 새로운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얻게되는 (머리 속) 내적표상과 해당 세계의 자료와 (그라운딩이 제대로 되지 않는) 불일치를 통해서 내적표상을 고치고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위험부담이 적으면서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재미있는 소설을 읽다 보니 중요한 철학적인 과제를 깨닫게 되는 이익을 얻듯이 말이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를 살아가는 유한적 존재에게 보다 넓은 세계에서도 통할 일반적인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가 된다.

이런 일이 여행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났다면, 잘못하는 데서 오는 위험부담률은 당사자의 주생존수단의 존폐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자신의 공간을 굳이 떠날 필요는 없다, 즉 여행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집단들의 대표적인 경우가 선을 수행하는 스님이던가 자신들의 거처를 떠나지 않고 믿음을 실행하는 수도승들의 경우가 되겠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세상과 생에 대해 reductionist의 입장에서 이론적인 추론의 깊이를 더해 가면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깊이우선탐색방법에 믿음을 두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은 나에게는 경험주의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임으로써 축적된 지식과 자료를 정리하고 조직화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넓이우선탐색방법의 추종자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세상이 복잡하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전자의 태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것이다.

부처 이래로 얼마나 적은 수의 수도승들이 개안을 했는 지를 아시는가?

수도승이라고 얼마나 더 낫겠는가?

복잡한 추론은 추론이 진행하여 갈수록 오류의 확률이 지수적으로 높아진다.


한편, 귀납적인 경험주의의 추론에서는 단계마다 가면서 우리는 여행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실에 접할 때마다 기존의 추론과 그라운딩시켜보면서 추론의 오류를 확인하는 사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셀 옹프레씨가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책을 읽는 과정이 아주 훌륭한 여행"이라고 하는 말에, 아니면 그런 해석에, 나는 동의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행을 시작하는 아주 훌륭한 단계이지만, 결코 여행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 이야기는 여행자에게 탐색할 여행지에 대해 사전에 머리 속에 좋은 내적표상을 만드는 재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여행을 잘 하는 데에 아주 좋은 전단계이지만, 결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의 여부를 여행자에게 오감으로 그라운딩시켜서 모델의 타당성을 납득시킬 수가 있는 주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J가 얘기하듯이 (여행에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잠시 곁눈질이라고 해보는 기회가 된다" 하는거나, 류시화씨가 말하는 <그리고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선가 자기 자신과 만나서 뜨겁게 해후하리라.>라고 하는 것은 결국 기대하지 않았는데 전혀 모르던 새로운 세계의 낯선 상황에서 내 머리 속의 내적표상이 내 오각을 통해 들어오는 그 세계의 데이타들과 잘 어울리는 그라운딩이 생겼다는 것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