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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5월 계우회보에 난 아버님과 5인독서회사건 기사

cool2848 2008. 12. 11. 14:36

아래의 글은 중앙중고등학교 동창회보인 계우회보에 실린 글을 편집자의 양해를 얻어 개인적 기록을 위해 올립니다.

원본에 있던 사진은 올리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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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일 발행 계우회보 131호

(6면 이기을 교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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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경에 잡힌 뒤 최복현 선생, 복학시켜준 현상윤 선생 잊지 못해”

1억 원을 학교에 기탁, ‘최복현 기념장학금’ 설립에 나선 ‘5인독서회 사건’ 주역


  3월말 모교에 한 통의 편지가 강원도 속초에서 날아든다. 빨간 괘선이 그어진 200자 원고지 6장에 이르는 이 편지는 모교 33회 도운 이기을(島雲 李氣乙·85세·연세대 경영대 명예교수) 교우가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서 이 교우는 자신이 1941년 9월 ‘중앙 5인 독서회 사건’으로 고 당시 교사인 최복현(崔福鉉·17회·1906~1979) 선생과 함흥형무소에 투옥된 당시 학생이라며 ‘최복현 선생 기념장학금’으로 1억 원을 내겠다고 밝혔다. 이 교우는 우선 5000만원을 먼저 내고 나머지 5000만원은 적금이 나오는 10월에 보내겠다고 했다. 이 장학금을 조성하는 이유는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최복현 선생이 혼자 책임을 졌기 때문이며, 총독부의 퇴학 조처를 물리치고 졸업을 시켜준 당시 교장인 기당 현상윤(幾堂 玄相允) 선생의 은혜를 잊을 수 없고 감사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모교는 즉시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상경할 일이 있으면 모교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교우는 은퇴 후 속초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마침 4월9일이 총선이어서 8일 상경한 이 교우는 모교를 방문해 윤시탁 교장과 김상인 행정실장을 만났다. 아들 일병(一昺·62회·연세대 공대 교수) 교우가 아버지를 모시고 모교 교장실을 방문했다. 30회와 40회대 초반 모교 졸업생들은 일제 말기, 독립과 건국, 6·25사변을 통해 생과 사를 넘나들며 여러 난관을 극복한 세대이다.


최복현 선생, 학생들 석방 요청

  -5인 독서회 사건 당시를 회고해 주시죠. 80년사에 그 내용이 기술돼 있더군요.

  “3학년이던 1939년 동급생으로 막역한 노국환(盧國煥), 황종갑(黃鍾甲), 조성훈(趙誠勳), 유영하(柳永夏)와 매주 한 두 차례 만나다가 차츰, 이야기 주제가 민족정기, 독립쟁취를 위한 민중의 조직화, 일제의 정치형세에 까지 미쳤지요. 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등 금서도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4학년인 1940년10월, ‘5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지도교사로 최복현 선생을 모셨지요. 일주일에 한번 씩 만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였습니다.

  -일경에 잡혀가게 된 것은 어떻게 진행된 것입니까.

  “5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1941년 7월 초순, 우리는 일반사회와 연락 관계가 논의돼 방학 중에 이를 하기로 하고 황종갑과 나는 고향이 함경도이니 고향에서 항일(抗日)유격대와 연락하기로 했으며, 유영하와 조성훈은 일본 유학 중인 중앙 선배들과 연락하고, 노국환은 맏형(노일환·당시 동아일보 기자)과 부친에게서 상해 임시정부의 소식 등을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이런 활동사항들은 수시로 최복현 선생에게 보고됐다. 우리는 방학 중에 각자 임무를 마치고 2학기 개학 3~4일 전에 서울에서 만나 그 동안의 연락 상황을 설명하고 토의하자는 편지를 교환했다. 그러다 황종갑이 발송한 편지가 검열에 걸렸고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나와 황종갑은 8월14일, 노국환, 유영하, 조성훈은 8월22일 최복현 선생과 잡혀 동대문 경찰서에 연행됐고 다음 날 함흥으로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됐죠. 특히 몸이 약한 노국환이 고문을 당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게 되면 그 날은 고문을 하지 않아 우리가 그 덕을 봤지요. 일경은 조선어학회 사건의 구도에 맞게 우리를 그 시발점으로 엮으려고 했으나 안 됐죠. 그 당시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으나 중앙학교는 한국어를 사용한 것도 한 이유가 됐습니다.”

  -최복현 선생께서도 고초가 심했겠습니다.

  “심문이 백두산 정계비로 옮겨가면서 최 선생이 간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심문하던 한국계 형사가 화를 내며 교사가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쳤다고 하자 최 선생은 태연한 태도로 ‘우리 교육자는 목이 달아나도 사실대로 가르치지, 당신들과 같이 그때그때의 이익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조작하지 않소’라고 반박했습니다. 최 선생은 특히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내 역사 강의를 듣고 학생들의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됐으니 저 학생들을 석방해주기를 바란다. 학생들을 대신해 나를 처벌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학생이고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체포된 지 3개월 여 만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12월3일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됐습니다. 그러나 최 선생은 2년 후인 1943년 1월에 출옥하게 됩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 정말 최 선생께서 그 엄한 상황에서 제자들에 대한 배려는 잊을 수 없습니다.”


현상윤 교장, 퇴학 지시에 맞서

  최 선생이 출옥할 때 이 교우도 함흥형무소로 선생을 마중하러 간다. 선생은 이제 한반도에서 직장을 가질 수가 없어 당시 경방의 김연수(金秊洙·인촌 김성수 친동생) 사장의 주선으로 만주 봉천에 있는 남만주방적주식회사에서 교육 부문의 일을 맡는다. 해방 후 순천중 교장, 서울대 사대 교수(1948년~1961년)를 거쳐 모교 18대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65년 서울시 교육감으로 피선됐다.

  -학교로 돌아가신 뒤에도 퇴학 조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중앙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당연히 퇴학됐을 것입니다. 현상윤 교장에게 학무국으로부터 퇴학을 시키라는 지시가 왔습니다. 현 교장은 학무국으로 직접 가서 이들을 다 퇴학시키면 방황하게 된다며 설득했습니다. 밀고 당기는 일이 계속되다가  학무국에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해 황종갑이 ‘내가 어리니까 퇴학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결국 총독부와 타협을 보게 됐고 2학기 공부도 못한 채 복학해, 다음 해인 1942년 3월에 졸업했고 황종갑은 1년 뒤에 졸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복교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도 없는 것이지요.”

  졸업 후 이 교우의 아버지는 아들을 일본 동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보냈고 제일고등학원에 입학, 5학년에서 다 못한 공부를 보완하다가, 불령선인으로 찍혀 있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12월 동경 유학을 정리하고 1943년 4월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한다. 그해 11월 이 교우는 아버지가 아들의 학병 문제로 인해 함흥경찰서에 감금됐다는 연락을 받고, 결국 현지로 내려가 협박을 받고 학병에 지원하게 된다. 그가 근무한 곳은 규슈(九州)의 가고시마(鹿兒島). 남방으로 끌려가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고 중국 전선으로 보내달라고 부대장에게 탄원하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 교우는 중국으로 가면 대한 독립군으로 탈출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이 교우는 해방을 이곳에서 맞는다.

  1945년 9월,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이 교우는 북청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공산주의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고향에서 결혼한 이 교우는 1946년 5월말 일가가 서울로 월남, 청파동에 집을 구해 자리를 잡는다. 그 해 6월 연희전문 3년으로 복학한 이 교우는 교수를 대신해 원가계산 강의도 하면서 1947년 8월에 졸업한다. 당시 영어강습소(학원)에서 잠시 영어 강사로도 있었던 이 교우는 중앙학교 영어 교사로 유명했던 ‘무턱(별명)’ 유경상(劉敬相) 선생 방식대로 10대 청소년들을 호되게 가르쳐 다들 90점 이상 성적으로 바꿔 놓으면서 인기를 끌었는데 “역시 영어는 맞아가면서 달달 외우게 하는 무턱 선생의 방식이 최고라는 것을 다시 알았다”고 회고했다.


교수로 봉직은 최복현 선생 은혜 

  이 교우는 졸업과 동시에 경성전기(한국전력의 전신)에 입사했고, 6·25사변을 거치면서 부산에서 연세대 경제학과를 1952년에 졸업하고 한국은행 조사부에 근무하면서 1954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이 교우는 1955년부터 연세대 경영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 뒤 그의 평생 직업인 교육자의 길을 걷는다. 당시 한국은행에도 계속 근무했다. 미국 워싱턴대 경영대학원을 1년 수료 후 귀국하면서 조교수로 승진하고 이때 한국은행을 그만 두게 된다. 1971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이 교우는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 교우는 60년대에 일본 국제기독교대 부교수를 지냈고 80년대 들어 일본 게이오대 객원교수, 증권학회장, 프랑스 파리에 파견된 OECD 한국 대표 등도 지냈다. 

  -같이 고초를 겪었던 동기들은 졸업 후 어떤 일에 종사했습니까.

  “노국환은 고려대 법대를 가서 전북대 교수로 있다가 한때 정치도 했습니다. 황종갑은 학병을 다녀온 뒤 해방 후 육사에 들어가 후에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일본에 같이 갔던 조성훈은 중앙대 예과에 입학, 후에 여러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들 3명은 모두 작고했습니다. 유영하의 소식은 그 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유 교우는 매년 3·1절마다 탑골공원 손병희 선생 동상 앞에서 민간 추모식을 벌여왔는데 2006년 8월31일자 계우회보 인터뷰에서 소개됐다. 현재 유 교우는 노환으로 와병 중에 있다.)”

  -해방 후 독립유공자로 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당시 학생들이었으니까,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뒤늦게 군에 있던 황종갑이 최복현 선생을 포함, 우리 5명을 신청했으나, 최 선생만 해당이 됐죠. 최 선생께서 나는 받을 자격이 없다고 사양했으나 우리가 설득하느라고 고생했습니다. 그 이후 다시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복현 선생 기념장학금을 혼자 조성하게 됐습니다. 다른 4명의 동기나 최 선생님 유족들과는 상의가 있었는지요.

  “사실 동기생들과 접촉해 같이 하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거나 작고해 그만 두었습니다. 최 선생 유족들과 연결이 됐지만 뜻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형편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라도 최 선생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 조금 씩 모은 돈이 지난 3월15일 5000만원이 됐습니다. 2차분은 적금이 오는 10월25일이 끝나지만 일요일이어서 10월27일 학교로 보낼 예정입니다.”

  한편 모교는 이 장학기금의 이자에서 나올 과실금을 다 사용하지 않고 원금을 조금씩 불려 나갈 계획으로 있다. 만약 이 교우가 원할 경우에는 교우회 산하 계원장학회에 이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우는 1988년 은퇴 후 연세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속초로 옮겨 살고 있다. 이곳에 있는 동우대학교의 명예교수로 강의도 하고 글도 쓴다. 이 교우는 1999년 10월 살아온 여정을 담은 ‘도운 자서전’을 펴냈다. 서문에서 이 교우는 교수로 35년간 봉직이 기쁘고 행복스러운 일이었다며 이 자서전이 23번째의 저작이고 평생 5만여 장의 원고를 썼다고 밝혔다.

  이 교우는 하루 1만보 걷기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은퇴한 교수 모임, 속초시의 원로회, 골프 모임에도 참석한다.               <글 김석규 편집장, 사진 유광렬>    

 

 <후기: 2008년 10월 말에 5000만원까지 장학금으로 모교에 송금한 이 교우는 각 5000만원으로 ‘현상윤 기념 장학금’, ‘최복현 기념 장학금’으로 나눠 기탁한다고 밝혔다. 모교에서도 그의 뜻을 그대로 받아 들여 2009년 3월부터 장학금을 받을 재학생을 선발하기로 했다.>